요가매트 위에서 배운 다정한 언어
발바닥 전체를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두 발을 골반 너비 정도로 편안하게 두고 섭니다.
왼발을 바닥에서 천천히 들어 올립니다.
몸의 중심과 균형을 잡습니다.
균형이 잡히면 왼쪽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른손으로 왼쪽 발바닥 바깥쪽을 감싸 잡고, 천천히 왼쪽 다리를 앞으로 뻗어냅니다.
무릎이 조금 구부러져 있어도 괜찮습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고, 아랫배에 가만히 힘을 준 채 호흡을 이어갑니다.
가슴부터 천천히 왼쪽으로 돌려봅니다. 배, 가슴, 어깨의 순서로 몸통을 회전합니다.
"이제 원한다면 왼손을 뻗어 주세요. 원하시는 분들은 시선을 회전한 방향으로 천천히 옮겨 봅니다."
몸통이 양옆으로 길게 확장되는 느낌을 받던 그 순간,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원한다면?'
선생님은 ‘가능하다면’이 아니라 ‘원한다면’이라고 하셨다. 평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던가?
요가 매트를 접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 한마디가 마음에 와서 닿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참 다정하게 느껴졌다.
‘원한다면’과 ‘가능하다면’은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게 가능해?", "가능하지 않아"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때의 '가능'은 은연중에 능력의 유무를 묻는 말이 되기 쉽다. 거기에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담길 때가 많다. 내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상황, 혹은 기준을 세워두고 상대를 판단하려는 거친 마음이 작용할 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오곤 한다.
"너 그렇게 해서 가능하겠어?"
"가능하다면 어디 한번 해봐."
반면 ‘원한다면’은 주도권을 그 사람 자신에게 내어주는 말이다.
"네가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한 사람의 자율과 판단을 맡기는 신뢰의 언어이다.
요가를 할 때도 그렇다.
날마다 몸의 컨디션이 다르고 마음의 상태가 다르다. 어제는 잘되던 동작이 오늘은 거짓말처럼 되지 않기도 하고,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 때문에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 날도 있다. 그럴 때 외부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채찍질하는 대신, 오늘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난이도를 스스로 선택하게 도와주는 말이 바로 ‘원한다면’이다.
타인의 시선에 내 능력을 매어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바라보고 스스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
나에게 요가는 타인의 평가를 견디는 '가능함'의 영역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바라보는 '원함'의 영역이었다.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지도 언어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선생님은 ‘가능하다면’이라는 말도 쓰셨고, ‘원한다면’이라는 말도 쓰셨다.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특별한 의도를 두고 구분해 쓰신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누군가 ‘가능하다면’이라고 말할 때 늘 나쁜 의도를 품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하지만 '원한다면'이라는 단어가 주는 다정함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의도적으로라도 "원한다면"이라는 말을 써보고 싶어졌다.
상대의 상태를 가만히 살피고, 타인의 강요가 아닌 그 사람 스스로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해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단어가 품고 있는 따뜻한 다정함을 닮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무심코 툭툭 내뱉는 나의 말투는 그리 곱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원한다면’이라는 말은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삶의 지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