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mm의 충실함에 대하여
수업 시간 외에는 도무지 사적인 말을 섞지 않는, 꽤나 내성적이고 쿨한 요가 선생님이 있었다.
그의 수련 프로그램에는 머리서기와 쟁기 자세가 자주 들어갔다.
요가를 오래 했고, 그렇게 자주 연습했건만 나는 쟁기 자세를 할 때마다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어느 날, 감히 말 붙이기도 힘든 선생님에게 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선생님, 저는 요가를 오래 했는데 쟁기 자세를 할 때 계속 발이 바닥에 안 닿아요. 왜 그럴까요?”
어떤 명쾌하고 전문적인 해결바카라이 나오리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선생님의 답변은 의외로 심플했다.
“꼭 해야 돼요?”
“아…… 뭐, 꼭 해야 하는 건 아니……긴 하죠.”
그렇게 허무하게 질문과 답변이 끝났다.
하지만 수련이 끝난 뒤에도 나의 질문과 선생님의 답변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왜 나는 쟁기 자세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려고 애썼을까? 무엇 때문에 그 자세에 연연했던 걸까? 쟁기 자세의 완성이 정말 내 목표였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래 했으니까? 남들이 다 하니까? 요가를 이만큼 했으면 그 정도 동작은 해내야 하니까?’ 그 어떤 이유도 ‘나’라는 주어가 들어간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문득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왜 요가를 하고 있지? 나는 요가를 통해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걸까?’
사실 나는 '그냥' 요가를 할 뿐이었다. 요가를 하는 그 시간 자체가 좋아서,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어서, 때로는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발견할 수 있어서. 그리고 아사나(요가 동작)를 지탱하는 몸의 힘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몸을 쓰는 그 방향이 결국 내면의 근력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쟁기 자세에서 발이 바닥에 닿든 닿지 않든,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요가를 오래 했더라도 기본인 태양 경배 자세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요가 강사가 될 목표도 없었고, 내 신체 조건이 난도 높은 아사나를 모두 완벽히 해낼 만큼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살면서 깨달은 것은 노력과 타고난 재능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디자이너로 일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라고 답하기 어렵다. 아주 탁월한 천재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재능이 아예 없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어릴 적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나의 한계를 담담히 인정하게 되었다. 타고남만이 목표에 이르는 유일한 열쇠는 아니다. 타고남과 노력, 그리고 저마다 다른 삶의 조건이 사람마다 다른 비율로 얽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남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위치’를 찾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완벽한 쟁기 자세’라는 타인의 기준과 선망을 내 목표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쟁기 자세에서 발이 닿지 않는다면, 안 되는 그 상태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어제보다 1mm 더 내려가고 있어’라는 나만의 미세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지금 그 자리에 충실한 것.
선생님이 던진 “꼭 해야 돼요?”라는 무심한 답변이 정확히 어떤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요가적 의미이자, ‘지금 너 자신의 상태에 충실하라’는 따뜻한 조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난번, 딱 한 번 쟁기 자세에서 발끝이 겨우겨우 바닥에 닿았던 적이 있다. 어깨와 목의 각도가 그날따라 유난히 편안했고 숨 쉬기조차 힘들지 않았던 날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다시 안 되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되는 날은 되는 대로 변화하는 내 몸을 발견하고,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대로 그날의 내 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