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가 꽤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도 하고 있었고, 투자도 하고 있었고, 소비도 줄이고 있었고, 자산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모임에 가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나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하고 슬쩍슬쩍 제 이야기를 끼워 넣었습니다.
"전 요즘 파이어 준비 중이에요"
일전에 글로 썼던, 경제 유튜브 프로젝트를 하면서 알게 된 분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재테크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바카라도 여러 권 내셨고 강연도 많이 다니셨습니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괜히 조금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파이어를 목표로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근데 쉽지 않네요"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물었습니다.
"언제요?"
"네?"
"파이어 언제 하실 건데요?"
순간 머리가 멈췄습니다. 언제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생각했지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뭐.. 최대한 빨리요?"
제가 얼버무리자 그분이 웃었습니다.
"그게 제일 위험한 답인데"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목표 금액은요? 10억? 20억?"
허둥지둥 예전에 주워들은 공식으로 계산해 둔 금액을 말했습니다. 그분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이나 아이 교육비 같은 것도 대략적으로 반영한 거죠?"
"네? 아직 그 정도로 구체적으로는.."
"그럼 목표가 없는 거잖아요"
괜히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서울에서 부산 간다고 해봅시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고 출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죠"
"그런데 왜 파이어는 그렇게 준비해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파이어를 준비한다면서 정작 제대로 된 목표를 정해놓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분을 만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달성했고, 돈에 관한 바카라도 여러 권 쓰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 역시 업계에서는 거의 구루처럼 대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또 조심스럽게 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도 파이어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분은 한참 동안 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더니 예상 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파이어하면 뭐 하실 건데요?"
이번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또 막혔습니다.
"음.. 여행도 다니고.."
"그다음은요?"
"어.."
"사업은 안 하실 거예요?"
"아마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지금이랑 뭐가 달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파이어를 꿈꾼 게 아니라 일을 안 해도 되는 상태만 막연히 꿈꾸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파이어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주식도 보고, 부동산도 보고, 사업도 했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파이어를 하면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방법만 연구하면 안 돼요"
"네.."
"미래를 먼저 그려야죠"
집에 돌아오는 길이 묘했습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하나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파이어를 할 건가?
얼마가 필요할까? 파이어를 하면 뭘 하고 살까? 그날 이후 진지하게 구체적인 목표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종이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45세까지(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순자산 ○○억.
주 3일 정도만 일하기.
글쓰기와 사업은 계속하기.
아이와 보내는 시간 늘리기.
무료강의 등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하기.
이 간단한 리스트를 쓰는데 오래 걸리기도 했고 황당무계에 가까운 목표에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꿋꿋이 채워 넣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다시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막연할 때는 파이어가 신기루 같았습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생기고, 금액이 생기고, 파이어 이후의 그림이 생기자 갑자기 현실적인 목표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지도 없이 운전하다가 처음으로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입력한 기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두 분에게 혼난 건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파이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파이어를 준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었으니까요. 목표가 선명해지자 행동도 달라졌습니다. 투자 기준이 명확해졌고, 사업 판단도 쉬워졌고, 소비도 훨씬 단순해졌습니다. 한마디로 파이어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찔합니다. 저는 파이어를 준비한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정작 언제 할 건지, 얼마가 필요한지, 그 이후에 뭘 할 건지는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저는 지금도 열심히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