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단계. 파이어를 위해 수억원을 잃었다

by지크

저는 파이어를 준비하면서 수억 원을 잃었습니다. 주식으로 잃고, 코인으로 잃고, 아파트로 잃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이어에 가장 가까워진 순간은 돈을 벌었을 때가 아니라 그 손실을 인정했을 때였습니다.


파이어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결정은 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를 이야기하면 어떤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는지, 어떤 부동산으로 몇 배 수익을 냈는지 궁금해합니다. 저 역시 그런 이야기만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 파이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하나를 꼽으라면 돈을 많이 번 순간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무지할 때의 실패를 인정하고 미련을 버리고 손실을 확정한 날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관심 가져보지 않은 파주의 한 아파트를 지인이 거듭 추천을 했고 주변에 개발 이야기도 있었으며 탄탄한 회사도 있었고 부동산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부동산 가격이 영원히 오를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전세를 끼고 살 수 있어 투자금조차 얼마 들지 않았습니다. 아이 대학 등록금 정도는 쉽게 벌릴 거라 생각하며 고민 없이 구매를 결정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섣부르게 한 판단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아파트 가격은 끊임없이 떨어졌고 세입자가 나가는 상황에 전세금도 마련이 되지 않아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전세 만기가 다가오는데 잠이 안 왔습니다. 세입자가 나가겠다고 연락했는데 통장에 돈은 없었습니다. 급히 부모님께 돈을 빌릴 수 없었다면 대체 어떻게 해결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막막합니다. 또 매년 꼬박꼬박 재산세를 내는 것은 물론 1 가구 2 주택으로 인한 손해도 막심했습니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 주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수익이 났을 때는 제가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유튜브 몇 개 보고, 바카라 두 권 읽고, 경제 뉴스 좀 챙겨봤다고이제 시장이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초심자의 행운은 고민 없이 더 큰돈을 투자하게 만들었습니다. 야심 차게 들어간 몇몇 주식이 잠깐 오르는 듯하다가 매일같이 하락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물타기를 하니 투자금도 커지고 손실액도 점점 커졌습니다.


코인 광풍일 때 게임하듯 매수했던 코인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무슨 근거로 덜컥 샀는지 설명이 되지 않을, 소위 말하는 잡코인들이었습니다. 이 코인들마저 성실하게 쭉 떨어져서 모두 마이너스 90%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도 투자를 말아먹었고 그 손실액을 다 합치면 무려 수억 원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건 손실보다 희망이 더 무섭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오르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본전만 오면 팔자.


사람은 손실을 견디는 것보다 실패를 인정하는 걸 더 힘들어합니다. 저도 똑같았습니다. 매일같이 섣부르게 투자한 것을 후회하면서도 기다리면 해결된다는 막연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파이어 계획을 다시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노트에 자산을 하나씩 적었습니다.


예금.

주식.

부동산.


한참 적다가 갑자기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지금 현금이 있다고 치면 우리 저 아파트 다시 살까?"


아내는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절대 아니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사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럼 저 주식은?"


"그것도 안 살 것 같은데?"


쓴웃음이 났습니다. 다시 살 생각도 없는 자산을 몇 년째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좋아서 들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손실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매몰비용 오류라고 부르더군요. 이미 들어간 비용 때문에 비합리적인 결정을 계속하는 현상. 생각해 보니 딱 제 이야기였습니다.


찰리 멍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큰 실수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엄청나게 좋아진다"


예전에는 이 말을 들으면 투자 실패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다.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엑셀을 켜서 손실 금액을 다시 계산했습니다. 숫자를 보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돈이면 가족 여행을 몇 번이나 갈 수 있었을까. 신중하게 투자를 했으면 결과가 얼마나 달랐을까.


근데 이상했습니다. 손실 금액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습니다.


앞으로 5년 뒤에도 내가 이 아파트를 들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앞으로 10년 뒤에도 이 주식 차트를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손실보다 무서운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결심했습니다. 사실 결정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건 실행이었습니다. 매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손실이 현실이 되니까요. 그래도 눌렀습니다.


아파트를 팔았습니다.

주식도 정리했습니다.

코인도 모두 매도 후 앱까지 삭제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몇 년 동안 들고 있던 자산이었고 그 자산을 모으기 위해 제가 들인 노력은 다 나열하기도 어려웠기에 매도 버튼을 누르는데 손이 떨렸습니다.


신기하게도 팔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후회가 아니었습니다. 후련함 그리고 해방감이었습니다. 이제 매일 시세를 확인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뉴스가 나올 때마다 괜히 기대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언젠가는 오를 거라는 희망회로도 멈췄습니다.


몇 년 동안 제 머릿속 공간을 차지하던 짐이 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파이어는 자산을 늘리는 게임만이 아니라 때로는 잘못된 자산을 정리하는 게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이어에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더 중요했던 건 수익률이 아니라 방향이었습니다. 죽은 자산에 돈이 묶여 있는 상태보다 그 돈이 더 나은 곳에서 일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그날 정말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파이어에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손실을 확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드디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에게 죽어있는 자산은 필요 없었습니다. 손절을 하더라도 효율적인 재배치가 가능한 현금 자산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좋았거든요.


지금도 가끔 그 아파트 가격을 검색해 봅니다. 그 주식 차트도 봅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했을 겁니다.


'조금만 더 버틸걸'


그런데 이제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그때 안 팔았으면 아직도 거기에 묶여 있었겠구나'


그날 저는 돈을 잃었지만 시간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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