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과 농경의 탄생>

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03

by호시우행

가문 날의 먼지가 날리던 들판에서 야생 식물은 그저 지나가던 사냥꾼의 허기를 일시적으로 채워주는 한 끼 먹거리에 불과했다. 무성하게 자라난 줄기 사이에서 잘 익은 열매를 따고, 흙 속에 묻힌 덩이뿌리를 캐내며, 날것의 잎을 뜯어 먹던 시절의 인간에게 식물은 자연이 베푸는 우연한 선물이었다. 특정 식물이 어느 골짜기, 어느 계절에 붉게 여무는지 아는 지식은 생존에 필수적이었으나, 일단 열매를 채집하고 나면 사람들은 미련 없이 다른 구릉이나 강가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식물은 그 자리에 남았고, 사람은 다른 먹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떠돌았다.


그러나 농경은 이 수동적이고 이행적인 관계의 뿌리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사람이 먹거리를 찾아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전전하는 대신, 식물이 자라날 최적의 장소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이 어느 날 한 천재적인 개인의 일시적인 발명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자연에 존재하는 야생 식물을 채집해 이용하던 먼 옛날부터, 인간은 식물의 생장 환경에 미세하게 개입하는 서서히 축적된 관리 행동을 이어왔을 것이다. 자주 찾아가던 야생 곡물 자생지 주변의 무성한 잡목을 돌도끼로 잘라내 햇빛을 트여주고, 물이 웅덩이에 오래 머물도록 흙둑을 쌓아 올렸으며, 수확하다 바닥에 흩뿌려진 씨앗이 이듬해 싹을 틔우는 자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다시 찾아가는 경험이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되었다.


단순한 '식물 관리'와 본격적인 '농경' 사이에는 수세기에 걸친 아득한 이행기가 존재했다. 식물에 손길을 대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오늘날과 같은 풍성한 작물 형태로 변모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지역의 사람들은 야생 곡물밭을 정성껏 관리하면서도 여전히 사냥과 채집을 삶의 중심으로 유지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기후 변화나 인구 증가라는 생존의 압박에 밀려 식물을 직접 일구는 일에 일상의 대부분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야생의 생명체가 인간의 밭에 적응하여 작물화되는 과정은 인공적인 선택과 생태적 적응이 기나긴 세월 동안 중첩된 거대한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초기 인류에게 중요했던 것은 농업이라는 거창한 명칭이나 웅장한 문명의 선언이 아니었다. 오늘 당장 식구들이 허기를 달랠 식물이 어디에서 싹을 틔우는지 아는 것, 그 식물이 어느 절기에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지 알아채는 것,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낟알이 비를 맞은 뒤 새로운 생명으로 돋아나는 과정을 눈여겨보는 실용적인 경험이었다. 이러한 나날의 경험이 밀도 있게 쌓이면서, 식물은 들판에서 случайно 만나는 외부의 존재를 넘어 인간의 생활 양식과 일상 내부로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씨앗 한 알을 고르게 일군 흙 속에 묻는 행위에는 전에 없던 무거운 시간의 무게와 긴장감이 수반되었다. 씨앗은 수확 즉시 입으로 넣을 수 있는 구운 고기나 열매가 아니었다. 싹을 틔우고, 튼튼한 줄기를 뻗어 올리며, 잎을 펼쳐 햇빛을 머금고, 꽃을 피워 낟알을 차오르게 하기까지 까마득한 계절의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그 지루하고 불안한 시간 동안 사람은 밭 곁을 맴돌며 토양이 마르지 않게 멀리서 물을 파 오고, 어린 싹의 영양분을 빼앗는 잡초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뽑아내야 했다. 식물의 생명 주기 전체에 인간의 육체적 노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짝 밀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은 오직 먹거리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식물을 가꾸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이 살아가는 생태적 조건 전체를 세심하게 수용하고 돌보아야 했다. 수량이 부족하면 땅을 파서 물길을 대야 했고, 장대비에 밭둑이 무너지면 흙을 짊어져 와 축대를 고쳐 쌓아야 했으며, 경쟁 식물이 세력을 넓히면 온몸이 땀에 젖도록 김을 매어야 했다. 씨앗을 땅에 넣는 행위는 농사의 시작일 뿐, 결코 끝이 아니었다. 농경은 식물의 고유한 생명 활동에 인간의 피와 땀, 일상의 노동을 끊임없이 주입하여 결속시키는 정교한 수용의 과정이었다.


이 밀밀한 연결은 결국 식물의 몸체와 유전자 속에도 뚜렷한 생물학적 흔적을 남겼다. 들판에서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야생 식물에게는 씨앗을 멀리 튕겨 내어 넓은 범위로 번식시키는 탈립성(脫粒性)이나, 환경이 불리할 때 싹트는 시기를 스스로 조절하는 휴면성이 생존의 핵심 전략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씨앗을 거두어 들여 다시 정성껏 일군 밭에 심는 환경이 조성되자, 식물에게 요구되는 생존의 법칙은 완벽히 뒤바뀌었다. 수확할 때까지 꼬투리가 터지지 않고 줄기에 붙어 있는 개체, 껍질이 얇아 물에 불리면 즉시 단단함을 풀고 고르게 싹을 틔우는 개체가 인간의 손에 의해 선택되어 다음 세대의 밭으로 옮겨졌다.


당시의 사람들은 현대의 정밀한 유전학이나 교배 메커니즘을 알지 못했지만, 자기 밭에서 거둔 결실 중 어떤 씨앗을 다음 해의 흙으로 되돌려 보낼지 엄격하게 결단했다.


가짓수가 많고 수확하기에 손이 적게 드는 포기를 남겼다. 알갱이가 굵고 성숙 시기가 고른 개체를 골라 남겼다. 자기 집 밭의 척박한 토양과 잦은 가뭄을 끝내 견뎌낸 포기를 남겼다. 쓴맛이 적고 솥에 삶았을 때 껍질이 부드럽게 무르는 알갱이를 선별해 남겼다.


이 선발은 단 한 해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세대 농부의 절박한 선택은 다음 세대 씨앗의 유전적 지형이 되었고, 그다음 세대의 선택은 또 다른 생물학적 변화를 누적시켰다. 수백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미세한 형질의 차이들이 겹겹이 축적되면서, 야생의 모종과는 전혀 다른 생태적 특성과 형태를 지닌 인류 고유의 작물들이 지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농경의 탄생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굴복시킨 사건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두 방향의 거대한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사람은 식물의 형질과 유전자를 변형시켰다. 동시에 식물은 사람의 노동 구조와 삶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인간은 식물이 자라나는 자연의 시계에 자신의 온 삶을 맞추어 기다려야 했다. 파종을 마치고 나면 결실을 거두는 가을이 올 때까지 밭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작물의 상태를 일일이 살폈다. 농경에 필요한 노동의 성격과 강도 역시 인간의 임의적 의지가 아닌, 작물의 생체 주기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되었다. 씨를 뿌려야 하는 절기가 있었고, 땀 흘려 김을 매어야 하는 계절이 있었으며, 물길을 정비하는 시기와 목숨을 걸고 수확을 마쳐야 하는 짧은 날들이 정해져 있었다. 인간의 고유한 삶의 시간표 속으로 식물의 생물학적 시간이 깊숙이 들어앉은 것이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도 계절의 흐름은 중요했다. 야생 과실이 여무는 시기가 달랐고, 연어가 강을슬슬 소슬하게 올라오는 철이 정해져 있었으며, 사슴떼가 이동하는 경로가 계절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경 슬롯에 들어서면서 계절의 미세한 파동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일구는 밭의 일상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봄비가 제때 내리지 않으면 토양이 말라 어린 싹이 땅을 뚫지 못했다. 여름철 가뭄이 조금만 길어져도 밭에 서 있는 작물 전체가 시들어 갔다. 한창 꽃이 피고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 시기에 짓궂은 장맛비가 쏟아지면 한 해 농사를 전면 망칠 위기에 직면했다. 수확을 눈앞에 둔 가을날 갑작스러운 강풍과 태풍이 쓸고 지나가면 수개월간 쏟아부은 농부의 모든 피땀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농부들이 매일 아침 구름의 모양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가 농업 노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늘의 구름과 바람, 단비와 햇볕, 토양의 습도와 강물의 수위는 멀리 떨어진 관념적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장 오늘 밤 식구들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밥가마의 무게와 직접적으로 결합한 생존의 변수였다. 인간은 자연을 더 깊이 관찰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자연의 바깥에 서서 한가롭게 관조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었다. 자신의 유일한 생계와 목숨을 담보로 걸고 수행하는 처절하고 밀도 높은 관찰이었다.


농경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은 풍요로운 먹거리의 가능성뿐만이 아니었다. 생존의 위협과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수확이 성하여 곡간에 곡식이 가득 차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내년 농사를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병충해나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급감하면 극심한 기근과 기아의 공포를 온 마을이 통째로 짊어져야 했다. 가뭄, 홍수, 벼락, 벌레 떼의 창궐은 인간의 초보적인 기술과 힘만으로는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초자연적 위협이었다.


농사는 자연을 완벽히 지배하고 통제하는 기술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쉼 없이 변동하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서, 그것이 가져오는 위험을 몸으로 감내하며 먹거리를 겨우 얻어내는 적응과 타협의 기술이었다.


그 때문에 농경은 인류에게 언제나 온전한 안정과 평화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한곳에 씨앗을 뿌리고 밭을 일구는 순간, 농부는 그 지역이 가진 기후의 폭력성과 토양의 한계를 온전히 함께 짊어져야 했다. 특히 특정한 단일 작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해당 작물이 병충해나 기후 이상으로 수확에 실패했을 때 삶 전체가 붕괴하는 위험의 폭도 치명적으로 커졌다. 농경은 스스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폭넓게 확장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목숨을 식물의 생장 상태와 수확 여부에 옴짝달싹할 수 없이 밀착시켰다.


식물이 밭에서 번성하는 것이 곧 인간 삶의 성취이자 풍요가 되었다. 식물이 밭에서 시들어 무너지는 것은 곧 인간 삶의 좌절이자 멸망이 되었다.


이 운명 공동체적 관계가 여러 세대에 걸쳐 누적되고 고착되면서, 농업은 단순한 식물 재배 기술의 범주를 넘어 인간 생활 양식의 근간이자 문화의 틀로 자리를 잡았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 거두는 노동이 연례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인간의 하루와 한 해를 바라보는 감각 자체가 재편되었다. 특정 계절에는 온 식구가 밭으로 나가 뼈가 부러질 듯한 노동을 견뎌야 했고, 또 다른 계절에는 숨을 죽인 채 곡간을 정비하며 다가올 농사의 도구를 깎았다. 사람의 한 해 삶의 궤적이 밭에서 일어나는 식물의 생태적 일대기와 완전히 하나로 겹쳐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경이 지구상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단일한 형태로 출범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고고학과 생물학이 밝혀낸 농업의 기원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단 한 번의 혁명적 사건으로 획일화되지 않는다.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야생 이만밀과 앗삼밀, 보리와 같은 야생 곡류가 인류의 손을 거쳐 주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동아시아의 온대 및 열대 지역에서는 야생 벼(Oryza rufipogon)와 강아지풀의 야생종에서 파생된 조, 수수 같은 작물이 각기 다른 습지와 건조지 환경에 맞추어 재배되었다. 중남미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볼품없는 야생 풀이었던 테오신테(Teosinte)가 수천 년에 걸친 인공 선택을 거치며 거대한 낟알 자루를 지닌 옥수수와 호박, 강낭콩으로 극적인 변신을 이루어냈다.


각 지역마다 고유한 기후 조건과 토양 특성이 존재했고, 곁에서 이용할 수 있는 야생 식물의 스펙트럼이 완전히 달랐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양식과 문화적 요구 또한 제각기 달랐다. 따라서 농경이라는 삶의 양식으로 진입하는 길 역시 지리적 환경에 따라 수많은 갈래로 갈라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야생 곡물을 채집하여 이용하다가 점진적으로 밭을 일구는 재배 농경으로 옮겨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정착 생활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식물 관리 기술이 물리적 환경과 맞물려 급격히 발전했다. 구릉 지대에서는 밭농사 형태의 관리가 중요하게 작동한 반면, 습지 주변에서는 수생 식물을 정밀하게 통제하는 독특한 재배 방식이 고안되었다. 농경의 탄생을 단 하나의 명확하고 극적인 장면으로 단정하여 그리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인류가 식물의 생태적 삶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관여하고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식물은 인간의 손을 매개로 삼아 본래의 자연 서식지를 넘어 전혀 새로운 지리적 장소로 이동해 갔다. 사람은 식물의 자람세와 생체 주기에 맞추어 자신의 노동력과 일상의 동선을 정교하게 조직했다. 농부의 엄정한 선택은 식물의 형태와 생물학적 몸을 바꾸어 놓았고, 그렇게 달라진 작물은 다시 인간의 일상과 슬롯적 구조를 크게 뒤흔들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결정짓는 필수적인 생태적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밀착된 관계는 인간에게 오직 일방적인 이익과 편의만을 선물하지 않았다. 사람은 당장의 허기를 채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식물을 심었지만, 일단 흙에 씨앗을 넣은 이상 식물의 생물학적 시계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쉼 없이 움직여야 했다. 맷돌질과 밭매기로 농부들의 관절에는 무서운 흔적이 남았고, 특정 곡물 중심의 식단은 때로 이빨을 썩게 하거나 영양의 불균형을 가져왔다. 씨앗을 심은 뒤에는 오매불망 수확을 기다려야 했고, 수확을 마친 뒤에는 다가올 농사의 생명줄을 이어가기 위해 가장 좋은 낟알을 절박하게 남겨두어야 했다. 농사는 한 번의 선택으로 완결되는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계절과 계절을 끊임없이 건너가야 하는 연속적인 생명의 서사였다.


그렇기에 농경에서 씨앗은 지나온 해의 최종 결실이자, 동시에 다가올 농사를 담보하는 인류 가장 정직한 약속이었다.


농부가 씨앗을 부드러운 흙 속에 넣는 순간, 토양 밑에서는 식물의 조용한 생명의 시간이 가동되기 시작한다. 식물이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 올리는 동안, 농부의 삶의 시간 역시 그 곁에서 동일한 템포로 흘러갔다. 수확한 곡식 중에서 가장 건강한 낟알을 따로 가려내어 씨앗으로 보관할 때, 그 한 해의 시간은 비로소 무사히 다음 해의 시간으로 넘겨질 수 있었다.


농경은 이렇게 단절되기 쉬운 한 해와 그다음 해를 씨앗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안전하게 결속시키는 문명적 삶의 틀을 창조했다. 그 틀 안에서 식물은 더 이상 인간에게 단순히 배를 채우는 소모성 먹거리에 그치지 않았다. 농부의 끊임없는 노동을 요구하고, 절기의 변화를 온몸으로 일깨우며, 수확의 기쁨과 긴장을 안겨주고, 다가올 계절의 농사를 다시 준비하게 만드는 거룩한 생명체였다.


인간이 야생 식물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이용해 온 역사만으로 농경의 전체 서사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역시 식물의 성육(成育)과 생명 주기에 자신들의 모든 삶을 철저히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경의 탄생은 인간이 자연의 품을 벗어나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인공 세계를 건설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식물이 지닌 섭리와 생태의 세계 안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간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무구한 운명적 관계가 수천 년 동안 이어지면서, 씨앗은 사람의 손길을 따라, 흙의 성질을 따라, 계절의 결을 따라 제각기 다른 변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일한 조상을 가졌던 식물이 모든 밭과 모든 장소에서 언제까지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떤 씨앗은 특정한 골짜기의 토양에 깊이 적응하여 수백 년 동안 농가의 헛간을 지켰고, 어떤 씨앗은 장돌뱅이나 시집가는 딸의 헝겊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전혀 새로운 땅으로 옮겨갔다. 새로운 토양과 기후를 만난 씨앗은 그곳의 자연 환경,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고유한 음식 문화와 만나 또 다른 형태의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농경이 범지구적으로 개막된 이후, 씨앗의 역사가 단 하나의 단순한 길로 내달리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식물을 직접 일구기 시작하면서, 작물의 작은 씨앗 속에는 특정한 장소와 사람들의 산 역사가 켜켜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장소의 역사를 따라 씨앗의 궤적을 짚어 나가다 보면, 우리는 본래 하나였던 같은 작물이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수많은 얼굴과 맛, 향을 지닌 씨앗들로 갈라져 살아왔는지 그 깊은 진실을 만나게 된다.

본래 하나였던 작물은 왜 각기 다른 땅에서 저마다 다른 씨앗의 얼굴을 갖게 되었을까.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3화<한 알의 씨앗과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