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자기 PR보다 먼저 쌓아야 하는 것

‘나는 이 일을 잘해요’보다 중요한 것

byyour philosophy

“저는 A를 더 하고 싶어요.”

“지금은 B와 C 업무가 많아서 제 전문성을 키우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A를 잘할 수 있는데 보여줄 기회가 없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을 꽤 좋게 봤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했고, 커리어에 욕심도 많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생각했다.

'자기 커리어를 남에게 맡겨두지 않는 사람이구나.'


회사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주어진 일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말하는 태도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함께 일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원하는 일에 대한 말은 많은데


문제는 지금 맡은 일이었다.

그 사람이 원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됐지만, 정작 현재 맡은 업무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드백을 하면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저는 이 일의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제 전문 분야가 아닌 일을 맡겨놓고 결과가 아쉽다고 하면 어떡해요?”


그리고 대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제가 팀 이동을 요청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그 말도 이해했다.

사람에게는 잘하는 일이 있고, 잘 맞는 일이 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맡기고 기존 전문성과 같은 수준의 성과를 요구한다면 회사에도 바카라임이 있다.


하지만 반복되다 보니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현재의 결과를 계속 미래의 커리어를 이유로 변명할 수 있을까.



회사가 원하는 일과 내가 원하는 일은 다를 수 있다


당시 회사가 그 사람에게 완전히 엉뚱한 일을 맡긴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브랜드 마케팅을 해온 사람에게 퍼포먼스 마케팅의 비중이 커진 정도에 가까웠다.


분명 다른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다.

하지만 회사의 상황도 달라지고 있었다.

브랜드를 알리는 것보다 당장 고객을 데려오는 일이 중요해졌고, 조직이 크지 않아 누군가는 그 일을 맡아야 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온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과 조직이 지금 필요로 하는 일이 어긋나는 순간.


그렇다고 회사가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니다.

10년 가까이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온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계속 맡기며 “월급 받으니까 그냥 해”라고 한다면 좋은 조직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 불안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원하는 역할을 말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말해야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요구가 커질수록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동 요청은 거의 2년 동안 이어졌다.

“A를 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맡은 일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라는 답이 반복됐다.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A를 맡기는 데 조심스러워졌다.

본인은 원하는 일을 더 많이 말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의 확신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다른 일을 주면 잘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무엇으로 믿어야 할까.

조직 안에서 다음 기회를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연결고리는 필요했다.


현재 맡은 일을 대하는 태도.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위해 별도로 쌓아온 결과물.

동료와 함께 일하면서 만든 신뢰.


말과 다음 기회 사이에는 결국 증거가 필요했다.



그 사람을 다르게 보게 된 날


그러던 어느 날 임원이 나를 불렀다.

“○○님이 다른 부문으로 옮기고 싶다고 저한테 메일을 보냈던데요?”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2년 가까이 나와 커리어 이야기를 나누던 팀원이 이번에는 임원에게 직접 조직 이동을 요청했다.


상사를 거치지 않고 상위 리더에게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언제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사가 기회를 막고 있을 수도 있고, 회사에 공식적인 내부 이동 제도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경로를 활용할 수 있다.


내가 마음에 걸렸던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 사람이 빠지면 지금 맡고 있던 일은 그대로 남는다.

그리고 그 일은 결국 다른 팀원들이 나누어 가져가야 했다.


내가 원하는 자리.

내가 하고 싶은 일.

내 커리어.

그것들은 아주 선명했지만,

그 선택으로 누가 무엇을 떠안게 되는지는 시야에서 빠져 있었다.


자기 커리어를 챙긴다는 것과, 자기 몫만 챙긴다는 것은 어디에서 갈릴까.



자기 PR도 결국 신뢰였다


회사에서 자기 PR은 필요하다.

가만히 있다고 누군가 내 강점을 알아봐주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역할을 말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자기 PR에도 순서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보다 먼저 쌓이는 것들.


지금 맡은 일을 어떻게 해냈는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어떤 증거를 만들었는가.

내 선택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까지 생각하는가.

이것들이 쌓일수록 같은 말의 무게가 달라진다.


그래서 가장 강한 자기 PR은 어쩌면

“저는 이런 일을 잘합니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라면 다음 일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을 주변 사람에게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면 커리어가 잘 풀릴까


그리고 이 일을 겪으며 커리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답을 너무 일찍 확신하는 것 역시 때로는 위험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 커리어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던 일들 중에는 내가 원해서 찾아간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왔고,

당시 조직에 필요해서 얼떨결에 맡은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내 일이 아닌데’ 싶었던 것을 하다 보니 의외로 잘 맞기도 했다.

그 경험이 새로운 역할이 되고, 그 역할이 다음 기회를 데려오기도 했다.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일만 골랐다면 만나지 못했을 성장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확신만큼

‘나에게 이런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다.


커리어에는 내가 선택해서 만드는 길도 있지만,

하다 보니 발견하게 되는 길도 있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러나 눈앞에 온 일을 너무 빨리

“내 길이 아니다.”

라고 밀어내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다.


어쩌면 커리어는 내가 계획한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맡았을 때 그것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냈는지까지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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