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빨리 얻고 싶어서 한 것
팀장으로 이직한 첫날부터 가장 어려웠던 건 일이 아니었다.
업무는 자료를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숫자를 보고, 이전 프로젝트를 살펴보고, 회의에 몇 번 들어가면 돌아가는 방식도 조금씩 보였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누가 어떤 성향인지.
누구와 누구의 사이가 가까운지.
어떤 문제가 오래 쌓여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했다.
‘이 사람들은 나를 팀장으로 받아들여줄까.’
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들어왔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전 회사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든, 어떤 일을 해냈든 이 사람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꽤 열심히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팀원들과 한 명씩 1:1을 했다.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무엇을 잘한다고 생각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새 팀장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 접근까지는 지금 생각해도 나쁘지 않았다.
일을 시키기 전에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금방 서로를 이해할 줄 알았다.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하는지 설명하면 팀원들도 내 의도를 알아줄 것이고, 내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면 어느 정도 함께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회의에서 한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고, 팀은 내가 기대한 속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성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압박도 있었다.
그러자 점점 조급해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몰라서 그런가?’
지금 생각하면 꽤 이상한 결론이었다.
몇 번 만난 사람들에게 벌써 마음까지 얻으려 하고 있었다.
손을 모으는 건 비교적 쉬워도,
마음을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말이다.
어느 날 팀원들을 모두 회의실에 모았다.
처음부터 긴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어떤 회사에서 일했는지 이야기했다.
어떤 일을 맡았고, 어떤 성과를 냈는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우리 팀이 어떻게 됐으면 하는지도 말했다.
처음에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설명은 길어졌다.
30분쯤 지났을까.
문득 팀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한 사람은 멍하니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별 반응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아무도 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는구나.'
그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했다.
아직 같이 일해보지도 않은 새 팀장이 앞에 서서
어디에서 일했고,
무엇을 잘했고,
어떤 성과를 냈고,
어떤 리더인지
한참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신뢰를 얻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냥
자기 자랑을 길게 하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몇 년 뒤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장면을 봤다.
새로 온 리더가 자신의 이력과 성과를 길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좋은 학교를 나왔고, 좋은 회사에서 좋은 경험도 많이 한 사람이었다.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내가 왜 듣고 있지?’
그리고 몇 초 뒤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아. 나도 저랬구나.'
그제야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조금 이해됐다.
자랑하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해서였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면 경력직도 다시 평가받는다.
특히 리더로 들어가면 더 그렇다.
‘왜 저 사람이 우리 팀장이 됐지?’
‘저 사람은 일을 잘할까?’
‘나를 제대로 평가해줄까?’
누구도 대놓고 묻지는 않지만 나 역시 그런 질문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답을 먼저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는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런 성과를 냈으니 믿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뢰는 그렇게 앞당겨지지 않았다.
경력 이직의 묘한 점이 있다.
회사는 과거의 경력을 보고 사람을 뽑는다.
그 경력이 나를 새로운 자리까지 데려다준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도착하는 순간, 함께 일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력서에 적힌 성과는 그 사람들에게 아직 남의 경험이다.
내가 실제로 어떤 판단을 하는지.
잘못됐을 때 바카라임지는 사람인지.
약속한 것을 지키는지.
팀원이 어려울 때 어떤 반응을 하는지.
자기 성과보다 팀의 성과를 앞세울 수 있는지.
결국 이런 장면들이 하나씩 쌓여야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판단이 생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믿기보다, 자기가 직접 겪은 것을 믿는다.
그 이후 새로운 조직을 맡을 때는 나를 설명하는 순서를 바꿨다.
처음부터 내 리더십 철학을 길게 이야기하기보다 먼저 듣는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힘든지, 지금 팀에서 무엇이 막혀 있는지 본다.
그리고 작은 약속을 지킨다.
“확인해볼게요”라고 했다면 정말 확인하고,
바꾸겠다고 했다면 가능한 만큼 바꾼다.
문제가 생기면 같이 해결한다.
필요할 때는 앞에 서고, 내가 잘못 판단했다면 인정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팀원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게 된다.
그때부터 서로의 일하는 방식도 조금씩 맞춰갈 수 있다.
같이 일하고,
판단하고,
약속을 지키고,
문제를 해결한 시간이 쌓여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같이 일해본 시간이 대신 설명하게 둔다.
어쩌면 경력직이 새로운 회사에서 다시 배워야 하는 첫 번째 일도 이것인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증명하는 것보다,
경험을 통해 믿게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