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이제 없지만, 그래도
매월 말이 되면, 다음 달의 생활비가 정해진다. 말일의 자산을 기준으로 5%를 셈하고, 그걸 1/12 하면 다음 달의 생활비다.
동반자의 주도하에 세운 규칙이다. 자산에 훈풍이 불던 때, 한창 사치를 하며 즐기다 불현듯 찬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이런 생활을 유지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5%도 대단히 절약은 아니다. 4%의 법칙보다 높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적으면 나로서는 좀 힘들어진다.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쓰던 관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5%로 하고, 수익을 좀 더 내자고 협의했다.
생활비를 초과해서 사용하면, 마이너스 통장인 상태로 놔두기로 했다. 다음 달 생활비가 들어오면 메꿔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규칙 덕분에 내년도 신세계 백화점 VIP 등급은 5,000만 원인 플래티넘에서 멈출 수 있었다.
매월 1일이면 결정된 금액을 생활비 통장으로 이체한다. 셀프로 월급을 주는 기분이다. 들어온 금액을 보며 마음속 장바구니를 뒤진다. 이번 달엔 뭘 살 수 있을까, 하며.
장바구니 가장 잘 보이는 곳에는 샤넬의 베이지 골드 색상 코코 크러쉬 미니 링이 모셔져 있다. 벌써 반 년 가까이 담아둔 것이다.
그 외 잡다한 가을 옷이나 신발, 액세서리 같은 것들도 여기저기 놓여 있다. 찬찬히 보며 생각한다. 이거 하나 정도는 이번 달에 사도 되지 않을까? 수업 결제할 것도 없고 외출을 좀 줄이면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여전히 코코 크러쉬를 사기에는 부족하다. 잘 사용하지 않는 가방을 몇 개 처분하자 마음먹는다. 안타깝게도 내 마음에는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그다지 반응이 없다. 이게 팔려야 코코 크러쉬를 사는데. 장바구니 속 반짝이는 퀼팅 반지를 바라보며 입맛만 다신다.
그래서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는 나에게 부족하게 느껴진다. 아니 사실은, 사치 비용이 부족한 것이다. 사치하지 않으면 충분한 금액이다.
시간이 많아서… 라고 탓해 본다. 멍하니 의미도 없는 검은 화면만 바라보다 관성처럼 들어가는 29cm, 하릴없이 추천템 스크롤 내리다 문득 눈에 띄는 아이템 찜해 두기.
사치를 알아버려서… 라고도 탓해 본다. 럭셔리 쇼를 찾아보다 흘러들어간 스타일리스트 채널, 이번 시즌 키 컬러 아이템으로 연출된 코디를 보며 홀린 듯 브랜드를 검색해 제품을 찾아내고 있는 나.
계절이 바뀐 탓도 한다. 바야흐로 아우터의 계절, 옷장에 코트도 니트도 많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꼭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이 아이템은 안타깝게도 나에겐 없다.
그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요즘 들어 반짝이는 것들이 예뻐 보인다. 코코 크러쉬도, 촘촘히 보석이 박힌 테니스 팔찌도, 빛을 반사하는 서클 체인 팔찌도, 나는 마치 고블린처럼 그것들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장바구니만 채워간다. 찬찬히 보면서 때로는 아이템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짐짓 이성적인 척하며, 예쁘지만 이건 여차하면 영포티 소리 들어, 갖고 싶지만 이건 비슷한 게 있어, 하면서.
그러나 아이템이 추가되는 속도가 지워지는 속도보다 빠르다. 알고리즘은 스타일리시한 아이템들을 내세워 나를 유혹하고, 나는 여전히 쇼핑몰을 위성처럼 맴돈다.
예기치 못한 소비가 생겨 쓸 돈이 줄어들면 애가 탄다. 아파서 가는 병원비여도 그렇다. 이번 달엔 아무것도 못 사네, 또 어떻게 참지. 눈 딱 감고 이것까지만 그냥 질러버릴까, 생각도 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려면 어때,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단순히 사치 비용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렇게 산 것들을 걸치고 갈 곳이 없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타거나, 테니스 수업을 갈 때 당연히 그런 옷들을 걸칠 수는 없다. 하물며 개똥 치우러 아르바이트 갈 때 그런 옷을 입으랴.
결국 어딘가 그럴듯한 곳으로 외출해야 한다. 백화점, 전시회, 근사한 식당. 대체로 돈을 쓰러 가는 곳들이다. 그러면 아무리 기회를 많이 만들어도 일주일에 하루 아니면 이틀이다. 매일 그런 곳에 가서 쓸 만큼의 돈도 물론 없거니와, 물리적으로 피곤하기도 하다.
그러면 F/W 시즌 5개월 동안 많이 해봐야 50번 남짓이다. 수백만 원짜리 옷을 매번 입는다 쳐도 1회 착용 비용은 10만 원을 훌쩍 넘긴다. 매번 단벌 신사일 수도 없으니 단가는 더 치솟는다. 처참한 가성비가 아닐 수 없다.
딱히 보여줄 사람도 없다. 나 스스로 만족하고 동반자에게 보여주는 게 전부다.
게다가 무언가를 사려면 소비를 줄여야 하고, 그러면 외출의 횟수도 줄여야 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반자는 비싸고 좋은 것 몇 개만 사서 자주 걸치라 조언한다. 과연 맞는 말이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F/W 시즌에 주어진 50회 남짓의 외출 기회. 가능하면 단가가 높은 것들을 애용해 주는 것이 맞는 계산법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29cm를 방문한다. 집 앞 잠깐 나갈 때, 가벼운 약속 자리에 너무 갖춘 티 나지 않는 캐주얼한 아이템들도 몇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사실은 옛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예 시절에는 계절별로 저렴한 옷들을 쇼핑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그것들을 실제로 걸치며 출근하곤 했다.
노동의 공간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소소하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작은 무대가 되어주었다. 매일 그 무대에 올라갈 옷을 고르는 것 또한 작은 즐거움이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문득 3초 정도, 아 그러면 어디 근처 사무실에 출근할 일자리 없을까? 생각이 든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사무 업무, 야근 없는 근무 시간, 내 사치품을 사용할 수 있는 편안한 무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옷 산 거 입으려고 다시 노예 생활을 하겠다고?
아니면 옷을 차려입고 가도 되는 뭔가를 배워볼까, 싶기도 하다. 그림이나 글쓰기, 하다못해 다시 공부라도 해볼까.
무언가 배우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쇼핑한 것들 걸치고 가고 싶어서,라고 생각하니 황당하고 우습기도 하다. 누가 보면 뺨 때릴 만큼 배부른 소리다.
올라갈 무대도 없는 채로, 허리춤에 손을 걸치고 황망히 마음속 장바구니와 이미 차오른 옷장을 바라본다.
불현듯 매월의 생활비를 제한해 둔 건 참 잘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신세계 VIP 다이아몬드를 찍고, 내 옷장은 더더욱 비좁아지고, 내 자산은 그만큼 헛되이 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제약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올가미이자 울타리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한 소비를 고민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욕망을 비워내고 장바구니를 전부 쏟아버리는 것이 가장 최선의 해결바카라인 것을, 그렇게는 하지를 못한다.
골치 아픈 생각은 그만하기로 한다. 올라갈 무대도 딱히 없지만 아무려면 어때, 이 안에서는 괜찮은 것 아니냐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문 앞에 배달된 휘뚜루마뚜루 가방을 집어 올리며 설렌다. 지난달 살까 말까 수십 번은 고민했던 가방이다. 가방 몇 개 정리할 거니까, 합리화하며 결국 질러버렸다. 중고 매물로 올린 가방은 아직 아무 소식도 없는데.
그리고 언젠가는 코코 크러쉬 링을 사서, 집 앞이든 어디든 매일 하고 다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