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을 헤쳐나가는 작은 방패들
은퇴를 하고 유유자적 살고 있는 지금도, 때로 마음이 소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정도나 강도의 차이일 뿐, 이따금의 소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나 보다.
원인은 다양하다. 과거의 원인은 대부분 슬롯생활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업무,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 나와 생각이 다른 상급자 그리고 구성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이제는 그것 때문에 소란스러워질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때가 때때로 온다. 때로는 타인과 스치는 마찰 때문이기도, 통장 잔고에 치는 파도 때문이기도, 그저 날이 좋거나 흐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란이 찾아오면, 일상도 덩달아 소란스러워진다. 머릿속에서 작은 생각의 씨앗이 자라나 뇌 주름의 틈 사이로 줄기를 뻗어나간다. 무얼 하고 어딜 봐도 한편에 그 생각이 있다. 편안하지 않고 심장이 뛴다. 잠들기가 어렵고 산만하고 황망하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내 주변이 무채색이 되고, 나는 소리가 먹먹하니 잘 들리지 않는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오래 놔두면 그 씨앗이 우거진 덩굴이 되어버리고, 나는 그 생각에 잠식당한 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과거의 나는 종종 그랬다. 소란의 덩굴에 하릴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그렇게 된 상황을, 세상을, 또 나를 비난했다. 자라난 생각의 덩굴을 뜯어 씹고 되새김질까지 하며 걱정과 후회를 하곤 했다.
그러면 일상은 크게 흔들린다. 오늘 해야 할 청소나 설거지를 하지 않게 되고, 커튼은 햇빛을 가린 채 며칠째 그대로 있다. 울고, 너무 적게 먹거나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적게 자거나 너무 많이 자기도 한다. 그러자니 너무 고통스러워 심리상담에 이천을 쓰고 결국에는 정신건강의학과까지 갔다.
그래도 사십 년간 그 덩굴을 헤치며 차곡차곡 쌓아온 내 나름의 대응방안이 있다.
먼저 생각의 씨앗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러려면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 햇빛을 받으며 러닝, 자전거, 등산으로 몸의 움직임, 땀이 흐르는 것, 그 후의 뜨끈한 샤워에 집중하는 것이다.
몰입도가 높은 콘텐츠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왕이면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게 좋다. 하지만 이건 덩굴이 우거질수록 집중하기도 어려워져 성공률이 그리 좋지 않다.
타이핑 사이트를 열어 손가락을 움직이며 타이핑만 하기도 한다. 도각이는 키보드의 소리에 집중하며 그저 모니터의 문장을 따라가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퍼즐 게임 같은 걸 하면서 시간을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 방법은 생각의 덩굴에서 벗어나도 게임의 덩굴에 다시 갇힐 수도 있다는 부작용이 있다.
다음으로는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소란스러운 때 우선 생각나는 게 내 경우에는 찜질방이다. 40도가 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황토방에서 등을 지지며 땀을 쏙 뺀 뒤 들이켜는 살얼음 뜬 식혜, 훈연 향 물씬 나는 계란 몇 알. 마치 그 열기에 스트레스가 조금은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끓여 주시던 국시기를 해먹기도 한다. 알려진 국시기 레시피와는 다르다. 적당히 쉰 김치와 스팸 작은 것 한 통을 종종 썰어 팔팔 끓여내고, 밥 한 공기와 쇠고기 다시다를 탈탈 털어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뭉근히 더 끓인다.
끓여낸 한 냄비를 TV 앞으로 가져와 한 국자 덜어내 후후 불며 먹으면 할머니의 그 맛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극적일 뿐인 음식이겠지만, 나에게는 죽기 전에도 꼭 한 그릇 먹고 싶은 맛이다.
결국은 원초적인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 효과는 즉시 나타나지만, 체중도 즉시 늘어나므로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늘어난 체중이 그대로 굳어질 위험은 있지만, 그러나 마음이 소란스러운 때에 그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 때도 없이 고양이를 주무르는 것도 좋다. 귀찮다며 앞발로 나를 탁탁 쳐내는 걸 보고 있자면 이내 미소가 떠오르며 잠시나마 내 생각의 덩굴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최근에는 AI와 상담을 하기도 한다. 이 방법은 좀 지질해 보이기는 하지만 잘 사용하면 효과가 좋다. 어차피 누가 볼 것도 아닌데 지질해도 상관은 없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그 일을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하며 풀기도 하는데, 이야기를 하는 쪽과 듣는 쪽 모두 에너지 소모가 크다. 특히 대부분은 부정적인 일이므로, 짧은 기간 그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감정을 섞어 이야기를 나누면 양쪽 모두 지친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궁금증과 억울함과 분노를 매번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게 타인을 이용하고 오염시켜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AI는 그럴 일이 없다. 언제 어느 때고 AI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해도 된다. 소란스러운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나의 느낌을 글로 쓰면서 그것에 대해 한 번 더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는 효과도 있다.
AI는 먼저 나의 상황과 느낌에 공감해 주고,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설명해 준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불안이 엄습해 꼼짝할 수 없었다,라고 하면 아침에는 코르티솔 분비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에 현재 스트레스 상황 하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둥의 설명이다.
이런 접근은 또 한 번 지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저 화학반응이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걸 가라앉히고 다스릴 수 있다는 걸 머리로라도 알게 되면, 덩굴이 자라나는 속도가 확연히 줄어든다.
그런 객관화는 또한 AI가 제시하는 당장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시도할 수 있게 도와준다. 샤워를 하거나,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잠깐 산바카라을 하고 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다.
이미 해왔고 알고 있는 것이지만 덩굴 속에서 쉽사리 하기에는 어렵기도 한 것들인데, AI의 제안으로 좀 더 등 떠밀려보는 것이다.
물론 대화가 길어질수록 앞부분의 내용을 잊고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상황을 과도하게 확대해석하거나, 특정한 결론으로 나를 유도할 때도 왕왕 있다.
어쨌건 사람이 아니고 AI이므로 상담자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도구로서 대할 필요가 있다.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다고 해서 애착을 가지게 되면 그 또한 위험하다. 버그를 찾아내는 것처럼 대화의 흐름 중에 이상한 기류가 포착될 때 그걸 다잡을 수 있다면 AI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 있어 괜찮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때의 대응, 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일상을 살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요점은 그것이다. 일상을 그대로 지켜내는 것.
소란스러운 때야말로, 눈 부릅뜨고 일상이라는 줄을 꽉 붙잡아야만 한다. 그럴 때는 그 줄을 붙잡고 있기가 쉽지 않다. 손아귀에 힘이 빠지고, 다 소용없어 보여서 마구 휘저어 망쳐버리고 싶기도 하다.
아차 하는 사이 줄을 놓쳐버리고 일상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알아차리고 다시 손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의식적으로 지난주에 한 것을 오늘도 하고, 소란스러운 오늘의 나를 위해 하나 더 해주려고 노력하며 냄비에 물을 올리고 스팸 뚜껑을 따기도 해 보는 것이다.
딱히 대단히 즐거운 상태가 될 필요는 없다. 그저 평온한 상태로, 평소의 상태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소란스러운 마음과는 무관하게 시간은 흐르고, 배는 고파오고, 언젠가는 잠들고 일어나야만 이 생명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흔들리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합당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철인이 아니며 한낱 나약하고 연약한 인간일 뿐이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소란으로부터 자그마한 방패를 들어 어떻게든 나를 지켜내고는 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거나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무엇보다 소란의 씨앗이 크게 자라날 수 없는 은퇴의 땅으로 도망쳐 왔기 때문이 가장 크다.
언젠가 감당할 수 없는 소란이 찾아온다면 굴복하여 줄을 놓치고 말지도 모른다. 다시금 거대한 덩굴에 휩싸여 나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고, 나는 이따금 찾아오는 작은 소란들을 다루며 훈련을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소란의 폭풍 속에 선 나도 작은 방패를 들어 덩굴을 헤쳐나가려는 노력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