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잉크가 지나간 자리

by최미혜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이 하나 있었다.

한창 그것을 좋아하던 때에는 거의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다. 글을 쓸 때도,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무언가를 공부하며 밑줄을 긋거나 생각나는 말을 여백 한쪽에 적어둘 때도 늘 그 만년필이 손에 있었다. 종이 위를 지날 때마다 사각사각, 때로는 사각사작 작은 소리를 냈다. 볼펜처럼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것도 아니었고, 연필처럼 거칠게 긁히는 것도 아니었다. 종이의 결을 살짝 건드리며 지나가는 특유의 감촉이 있었다.

그 소리가 좋아 한번 글을 시작하면 쓰잘 떼기 없는 '룰루랄라'~, '가나다라마바사'등등 요상한 단어들을 자꾸 쓰게 된다.

볼펜들과는 다르게 글씨를 쓰고 있다기보다 종이 위에 무언가를 천천히 새기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펜촉 끝에서 조금씩 흘러나와 하얀 종이 위에 글자가 되어 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내 손의 힘에 따라 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도, 같은 글자를 써도 매번 미묘하게 다른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도 좋았다.

내게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잉크를 채우는 일조차 작은 의식 같았다. 잉크병의 뚜껑을 열고 펜촉을 조심스럽게 담근 뒤 컨버터를 돌려 잉크를 빨아올렸다. 가끔 손끝에 잉크가 묻기도 했다. 잘 닦이지 않는 푸른빛이나 검은빛 얼룩이 손가락에 남으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는 흔적 같고 열심히 살아가는듯한 착각이 든다.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 날에는 휴지 위에 몇 번 선을 그어보기도 하고, 펜촉을 닦고 다시 끼우며 달랬다.

“왜 오늘은 말을 안 듣니.”

물건을 상대로 혼잣말까지 했으니 꽤 유난스러운 애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만년필을 다독거리며 수많은 문장을 써 내려갔다. 업무수첩의 빼곡한 일정도, 회의 중 급하게 받아 적은 단어들도, 공부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들도 그 만년필을 거쳐 종이 위에 남았다. 어떤 날에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어서 오래 펜을 들고 있었고, 어떤 날에는 그저 해야 할 일을 적느라 무심하게 펜촉을 움직였다.

모든 시간 속에 만년필이 있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도 언제나 같은 온도로 지속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잉크를 채우는 일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잉크가 마르면 닦아야 하고, 오래 쓰지 않으면 세척해야 하고, 종이에 따라 번지기도 하는 만년필이 조금씩 귀찮아졌다.

딸깍 누르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는 볼펜이 편해졌다.

아무렇게나 던져두어도 되고, 잉크가 묻을 걱정도 없고, 다 쓰면 새것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편리함은 생각보다 빠르게 애정을 밀어냈다.

처음에는 며칠이었다. 바카라상 위에 두고 다른 펜을 사용했다. 그러다 몇 주가 되었고, 어느 날 서랍을 정리하다 만년필을 집어넣었다.

‘나중에 다시 써야지.’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이라는 말은 많은 것들을 몇 년이 지나버렸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만년필대신 새로운 펜을 사용했고, 새로운 수첩을 샀고, 새로운 문서들을 작성했다. 수없이 많은 글자를 적었지만 만년필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은 서랍 한구석에서 나의 손과 조용히 이별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날 무언가를 찾으려고 서랍 깊숙한 곳을 뒤지다가 손끝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어둠 속에 갇혀있던 나의 만년필이었다.


분명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물건인데 오래 보지 않은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어색했다.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펜촉에 남아 있던 잉크는 이미 오래전에 메말라 있었다. 한때는 잉크를 머금고 부드럽게 글자를 만들어내던 펜촉이 이제는 차갑고 단단한 금속 조각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쇳덩어리 하나가 뾰족하게 날을 세운 채 그곳에 있었다.

이것이 정말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만년필이었나.

한때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며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던 물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낯설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건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만년필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랍 속에서 외롭지도 않았을 것이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한 죄바카라감을 느꼈다.

어쩌면 만년필에게 미안했던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에게 미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낭만을 쫓던 그 시절의 '나'까지 순간 서랍 깊숙한 곳에 함께 넣어두었던 것은 아닐까.

편리한 것들이 많아질수록 기다리는 일들이 줄였다.

글씨도 빠르게 적었고, 생각도 빠르게 정리했고, 필요한 문장은 키보드로 금세 입력했다. 틀리면 지우고, 문장을 바꾸고, 복사하고 붙이면 되었다.

빠르고 편리했다.

그런데 만년필을 손에 쥔 순간 오래 잊고 있던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만년필로 쓴 글자는 쉽게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종이에 내려앉은 잉크는 그대로 남는다.

조금 삐뚤어져도,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작은 얼룩이 생겨도 그 흔적을 품은 채 문장은 계속 이어진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만년필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지 않은 글씨가 그대로 남는 것.

한 글자를 쓰는 동안 다음 글자를 생각해야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적힌 문장이 오랫동안 종이에 머무는 것.

나는 굳어버린 만년필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세척하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에 펜촉을 담갔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지나자 오래 굳어 있던 잉크가 아주 조금씩 풀려나왔다. 맑았던 물에 검은빛이 번졌다. 몇 번이나 물을 갈아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시간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

깨끗해진 펜촉을 닦고 새로운 잉크를 채웠다.

그리고 종이 위에 펜을 올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선을 몇 번 그었다.

다시 한번.

그리고 어느 순간 펜촉 끝에서 아주 작은 검은 선 하나가 나타났다.

사각.

오래 잊고 있었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한번 선을 그었다.

사각, 사각.


예전의 그 소리다.

서둘러 쓰지 않았다.

잉크가 종이에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며 오래전처럼 펜을 조금씩 움직였다.

만년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이제야 나를 찾았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자신을 버려두었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시 잉크를 머금고 내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종이 위를 걸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때 좋아했던 것들은 대부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듣지 않은 음악도, 읽다 덮어둔 바카라도, 한동안 하지 않았던 취미도, 마음 한쪽에 접어두었던 꿈도.

어느 순간 귀찮아지고, 바빠지고, 다른 것들이 좋아져서 멀리 두었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시 손을 뻗으면 그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예전과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잉크는 말라 있을 수도 있고, 손에는 예전과 다른 힘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는 데 꼭 처음의 모습일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만년필을 꺼낸다.

예전처럼 매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편한 볼펜을 더 자주 쓰고, 대부분의 글은 키보드로 작성한다.

그래도 어떤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날이면 만년필을 찾는다.

잉크를 채우고 뚜껑을 열고 종이 위에 천천히 글자를 적는다.

사각, 사각.

그 작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가 어딘가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만년필을 바라보면 단순한 필기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했던 시간과, 잊었던 시간과, 다시 찾아낸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언젠가 또 서랍 속에 오래 머물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잉크가 다시 마른다 해도,

나는 이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메마른 펜촉에도 다시 잉크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래 멈추었던 문장도,

다시 그다음 글자부터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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