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혹은 서른의 날들 속에서 나는 거리를 활보하는 하나의 쨍한 빛이었다. 노랑과 핑크, 눈이 시릴 만큼 화려한 원색의 옷도 망설임 없이 입었다. 바람을 가르며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선명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배불리 먹고 달콤한 것을 실컷 먹어도 몸에는 별다른 흔적이 남지 않았다. 만 보, 이만 보쯤 걷는 건 일도 아니었고 무릎이 시린 줄도 몰랐다. 이 기세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은 늘 탄력 있고 건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늙는다는 건 아직 내 삶과는 한참 먼 이야기였다. 세월을 비껴갈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된 듯, 나는 젊음을 너무 당연하게 믿고 살았다.
그런데 세월은 요란한 소리 하나 없이 내 몸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거울 앞에 서면 어느새 화려한 색보다 무채색의 편안한 옷에 손이 간다. 얼마 전부터는 오십견까지 찾아와 높은 선반에 물건 하나 올려놓는 일도 쉽지 않다.
억울한 건 따로 있다. 먹는 양은 젊은 날의 반의반으로 줄었는데 몸무게는 왜 이렇게 늘어나는지. 옷장 속에 고이 걸려 있는 옛날 옷들은 이제 입을 수 없는 옷이라기보다, 한때의 나를 기억하게 하는 오래된 사진처럼 느껴진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비라도 오려 하면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시고 결린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몸의 당당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종종 서러웠다.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까지 작아지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흔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집에 갔다.
따뜻한 밥 한 끼와 반찬 몇 가지를 챙겨 들고 찾아간 그날, 나는 아버지 앞에서 철없이 나이 드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버지, 나도 이제 늙었나 봐.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여기저기 아프고, 조금만 움직여도 힘들고…. 내 몸이 너무 야속해.”
아흔의 세월을 살아오신 아버지 앞에서 내가 늙는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너는 아직 한창때여. 나는 인자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들다, 막내야.”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몸을 일으키시면서도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 말이다. 좀 더 너 자신을 아끼고, 살피고, 소중히 여기라고 그러는 거여. 어쩌것냐.”
그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구부정해진 등 뒤에 아흔 해의 삶을 짊어진 아버지가 그날따라 눈물 나도록 멋있어 보였다.
아흔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십의 딸은 아직 늙은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창때의 아이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쇠약해진 몸으로 내게 나이 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셨다.
늙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가는 일만은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 몸을 살피고,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가는 일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평소 같으면 불평했을 몸의 신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십견의 통증도, 조금만 걸으면 차오르는 숨도 더 이상 세월이 내게 내리는 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 몸은 이제야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돌보지 못했던 나를 이제는 좀 살펴달라고.
남을 챙기느라 늘 뒤로 미뤄두었던 나 자신도 이제는 조금 귀하게 여겨달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쳤던 작은 신호들을 이제는 그냥 넘기지 말아 달라고.
그날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니 몸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 이제야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흔의 아버지가 내게 건네주신 그 말을 오래 마음에 품어본다.
“너는 아직 한창때여.”
젊은 날의 눈부신 노랑과 핑크는 이제 옷장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대신 예전에는 몰랐던 깊은 색들이 내 삶에 들어오고 있다.
나를 다그치기보다 조금 더 보듬는 마음.
남에게만 내어주던 것을 나에게도 조금씩 돌려주는 마음.
늙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지금의 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래, 나는 아직 한창때다.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이제는 나를 소중히 살피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아흔의 아버지가 바라본 오십의 나는 아직 한창때다.
그리고 나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한창때란 젊어서 빛나는 시간만을 뜻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창때는, 비로소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고 사랑하기 시작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천천히 가자.
조금 아프면 쉬어가고,
숨이 차면 잠시 멈추고,
오늘의 몸을 오늘의 내가 잘 돌보면서.
이제부터 걸어갈 길은 남들보다 빨리 가는 길이 아니라, 나를 먼저 챙기며 걸어가는 길이다.
참 다정하고 고마운, 나의 한창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