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에서 쌓이는 것들

by어느 번역가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어떤 프로젝트의 영문화 작업이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별 망설임 없이 내일까지 생각을 정리해서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바로 보였다.


기준이 없으면 협업이 소모된다

피드백 파일을 열었을 때 코멘트가 1,000개에 가까웠다. 페이지마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하나씩 읽다 보니 패턴이 읽히기 시작했다. 따옴표 형식, 단위 표기, 문장 구조.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른 맥락으로 나온 말들인데 놀랍도록 비슷했다. 반복되는 피드백은 대개 같은 원인을 가리킨다.


원인이 구조 문제라면 해결바카라도 구조여야 한다. 여러 주체가 개입하는 작업에서 기준이 사전에 합의되지 않으면 각자의 판단이 기준이 된다. 그러면 작업 중에 판단이 충돌하고 수정이 쌓이고 일정이 늘어진다. 어떤 조직이든 프로젝트든 기획 단계에서 프레임워크를 세우고 각 당사자의 역할과 기준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야 협업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용어집은 언어의 기준이고, 스타일 가이드는 표현의 기준이며, 협업 프로세스는 소통의 기준이다.


쌓아온 것이 있어야 꺼낼 수 있다

생각을 담아 제안서를 쓰고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ESG 보고서 번역을 시작한 이래 번역 프로세스를 기록하고 용어집을 만들고 지침을 다듬어왔기 때문이다. 생성형 AI와의 대화를 통해 그것들을 체계화했고 번역 지침을 글로 남기고 프로세스를 문서화하는 행동들이 어느 순간 몸에 익었다. 그 오랜 수고가 이번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솔직히 그 수고를 쌓아가는 내내 이런 생각이 올라올 때가 있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지? 당장 수입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가시적인 결과가 눈앞에 없으니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의구심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잡는다

나는 원래 문제를 보면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원인을 짚고 솔루션을 찾는 것 자체가 즐겁다. 수주가 보장된 상황도 아니었는데 하루를 온종일 여기에 썼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의미가 있었던 건 조언을 구해왔다는 사실 자체였다. 내가 그만큼 신뢰를 쌓아왔다는 뜻으로 읽혔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질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면서 다시 떠올린 것이 있다. 부지런히 기록하고 체계를 세우고 내 일에 대한 철학을 조금씩 가시화해나가는 것,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시장에서 내가 자리를 잡아가는 방식이라는 것. 그것들은 눈에 바로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쌓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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