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10달러였다. 인보이스 발행하려고 매달 구독료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아까웠었는데 이제 다른 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로 인보이스를 발행할 수 있는 유명 앱으로 갈아탔지만 이번엔 불필요한 항목을 일일이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었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인보이스 앱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개발자도 아니었지만, 코딩 툴로 직접 만들어보니 너무 손쉬워 깜짝 놀랐다. 내가 원하는 항목만 넣고, 내가 원하는 양식으로 만들었다.
그 경험이 시작이었다. 그 후로 내게 필요한 기능들을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관리, 번역 지식 자산화, 콘텐츠 저장, 지식 관리. 지금은 내 번역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의 워크스페이스 안에 들어와 있다.
벅찼다. 그동안 내가 소망하던 것들이 눈앞에서 구현되는 걸 보면서 AI가 내 일상을 이렇게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오래전부터 원했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씩 가능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워크스페이스가 완성될 무렵에도 머릿속이 쉬지 않았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뭘 더 해야 하지.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바이브코딩, 클로드 코드, 코워크. 새로운 도구와 소식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바이브코딩 열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붐이 왔고, 맥 미니 품절 대란 소식이 뒤를 이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시스템 개선 아이디어가 자꾸만 떠올랐다. 적어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늘 따라다녔다. 뇌가 숨이 차서 호흡마저 버거운 느낌이었다.
그 여파는 일상에도 번졌다. 개인적 예약, 수리 일정, 생필품 구매 같은 평범한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머리 한켠이 항상 AI 관련 생각으로 차 있으니 다른 것들이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결국 노션 캘린더를 만들어 하나씩 기록해 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날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강아지와 산바카라을 하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자기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워킹맘이 나온 에피소드였다. 맥 미니 여러 대에 오픈클로를 설치해서 자신의 일정, 아이들 각각의 일정, 남편과의 가정일 분담까지 에이전트로 돌리고 있다고 했다. 업무 자동화에도 활용한다고 했다. 이어폰 너머로 그 얘기를 들으며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나도 한번 해봐야 하나. FOMO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링크드인을 열면 매일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AI로 얼마를 벌었다는 자랑, 뒤처질 거라는 불안을 조장하는 글, 전문 지식을 늘어놓는 글. 그 사이에서 나는 가능하면 호들갑스럽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 글을 찾는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포스팅이 있었다. 오픈클로 같은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 앱 개발자는 곧 설 자리가 없어질 거라는 내용이었다. 클로드에서 새 제품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불안을 조장하는 부류의 글이었다. 그런데 그 글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도 바삐 돌아가던 뇌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건 내가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따라갈 수 없구나. 그렇다면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다. 해방감이 들었다.
AI의 세계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가는 사람, AI 환각에 농담을 던지며 아직 멀었네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나 같은 사람. 이 세계에서 중심을 잡지 않으면 FOMO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도구는 계속 바뀐다. 지금 열풍인 것도 몇 달 후면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왔다. 그렇다면 바뀌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현재 내가 내린 답은 데이터다. 얼마 전 이 블로그에서 데이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는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 나는 어떤 작업이든 작업을 한 날은 노션 아카이브에 기록을 남긴다. 작업의 배경과 맥락, 그날 완료한 작업, 생성된 문서, 다음에 이어갈 것들을 기록한다. 해당 작업이 완료되면 그 기록을 완료 상태로 바꾸고, 후속으로 이어지면 같은 레코드에 계속 쌓아간다. 아직 이렇게 쌓아가는 데이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가치가 될지 잘 모른다. 하지만 모으다 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도구는 바뀌어도 내가 쌓은 데이터는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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