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역설적으로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모두가 같은 AI 도구를 쓴다면 차별화는 어디서 오는가. 맥킨지는 경쟁 우위는 도구가 아니라 내가 가진 데이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데이터를 AI의 화폐라고 표현한다. 아무리 좋은 엔진이 있어도 연료가 나쁘면 제대로 달릴 수 없다. 데이터가 준비되지 않으면 AI도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기업들도 이 현실을 알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가 AI 성공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기초가 필수적이라고 답했지만, 정작 자사 데이터가 신뢰할 만하다고 답한 비율은 55%에 불과했다. 알고는 있지만 준비는 안 된 상태. 이건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혼자 일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번역가인 내게 지식 자산화란 번역 경험과 판단을 데이터로 구조화하는 작업이다. 단순히 번역문을 모아두는 것이 아니다. 수년간 쌓아온 용어 선택의 기준, 문체 판단, 도메인 지식을 지금의 기준으로 검토하고 개선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내 경험과 판단이 담긴 데이터는 번역 품질의 토대가 된다. 이 데이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결과물에서 드러난다.
번역 지식 자산화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지난했다. 그동안 쌓아온 번역 작업에서 데이터를 추출하는 것부터 일이었다. 행이 밀리고, 전혀 엉뚱한 내용이 매칭되고, 추출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매칭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니 이번엔 다른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추출한 데이터가 과연 지금 기준에 맞는 수준인가. Garbage In, Garbage Out.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존 번역을 지금의 기준으로 개선하는 작업을 먼저 하기로 했다.
2~3일 예상이 3~4주로 늘어났다. 번역 비수기의 불안이 마음 저 깊이 존재하는 시기였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겠다 싶었고, 언젠가 예상치 못한 쓸모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어갔다.
처음엔 적은 양으로 시작해서 확인해 봤다. 데이터가 너무 적으니 용어 기준도, 문체 일관성도 잡히지 않았다. 조금씩 추가할수록 데이터베이스가 형태를 갖춰가는 게 느껴졌다. 작업을 반복할수록 노하우가 생겼고, 어느 순간부터는 속도가 붙었다. 지금은 번역 작업을 마칠 때마다 검토된 데이터가 자동으로 쌓이는 구조가 됐다.
데이터 클렌징이 이렇게 지난한 작업인지 몰랐다. 그리고 이 작업을 AI에게 맡길 수 없는 이유도 알게 됐다. 나만의 차별화된 번역 품질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게 기존 번역을 개선하는 판단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내 판단력이 살아 있어야 AI와의 협업이 빛을 발한다. AI에게 많은 것을 맡기고 편해지려는 본성을 억누르며 직접 기준을 세우고 데이터를 만든 것, 그것이 고유한 데이터의 힘이다. 도입에서 말한 경쟁 우위는 결국 이 과정에서 나온다. 번역을 해도 내게 남는 게 없다는 아쉬움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든든함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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