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채팅 그 너머

by어느 번역가

번역 일을 하면서 오랫동안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데 내게 남는 게 없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결과물은 클라이언트의 DB에 쌓이고, 내 손에 남는 건 회사 이름, 분야, 단어 수뿐이었다.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번역 과정에서 쌓인 판단과 노하우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으니 경험이 자산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번역가로서 전문성을 쌓아가고 싶은데 그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는 아쉬움이랄까.


그래서 디지털 환경만큼은 내 것으로 단단히 쌓아두고 싶었다. 번역 작업에서 나온 판단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기록해 두면 그게 곧 꺼내 쓸 수 있는 전문성이 된다. 내가 해온 활동들이 정리되어 있고, 필요할 때 말로도 글로도 설명할 수 있는 환경. 불필요한 것은 주기적으로 걷어내고 필요한 것만 남은 환경. 번역 일에서 자산으로 전환되지 못한 것을 디지털 환경에서만큼은 쌓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은 달랐다. 폴더 구조를 체계적으로 잡아도 시간이 지나면 산발적으로 늘어났다. 중복이 생기고, 방치된 폴더가 쌓였다. 언젠가 쓰일지 모를 문서라는 생각에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전수 조사를 하자니 프리랜서로 살아온 13년 치 분량이 너무 방대했다. 흩어진 채로 쌓여가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AI 채팅은 그 아쉬움을 부분적으로 풀어줬다. 흩어진 아이디어를 구조화하고 글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내 컴퓨터 안의 파일과 폴더는 여전히 손대지 못한 영역이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클로드 코워크(Cowork) 포스팅을 읽었다. 내 컴퓨터 폴더에 직접 접근해서 파일을 읽고, 수정하고, 새로 만든다고 했다. 내게 딱 필요한 기능이었다. 쌓여 있던 파일들을 이제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얼마나 속이 시원할까 싶었다. 혹시 필요할 문서를 실수로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저 많은 파일들을 언제 다 정리하지 하는 부담감을 덜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첫 작업으로 세금 보고를 택했다. 터보택스로 15년째 직접 세금 보고를 해오고 있다. 회계 지식이 개론 수준에 머무르다 보니 매년 어찌어찌 보고는 했지만, 하고 나면 모든 지식이 리셋되는 느낌이었다. 항목이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애매할 때가 많았다. 코워크에게 넘기자 신고 항목에 맞는 새 템플릿을 설계하고, 1년 치 카드 거래 350여 건을 초록·노랑·분홍으로 분류했다. 내가 확인할 건 분홍 90여 건 뿐이었다. 작년 세금 보고 문서에서 개인 정보를 지우고 분석을 시켜 놓치는 것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늘 애매하던 작업이 훨씬 명료해졌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홀가분했다.


구글 드라이브와 노션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했다. 세 작업을 마치고 나니 비로소 전체가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13년 치 서류와 업무 기록이 뒤섞여 있던 드라이브가 용도별로 정돈됐고, 도구별로 흩어져 중복되던 노션 페이지들이 프로젝트 유형별로 재편됐다. 세 작업 모두 흐름은 동일했다. AI가 전수 조사를 하고 구조를 제안하면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건 중복입니다"까지는 AI가 하지만 '이걸 진짜 지울지'는 매번 내 몫이었다. 작업을 반복할수록 AI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해야 하는 것의 경계가 선명해졌다.


정리가 끝난 자리에 다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번역 자산화, 프로젝트 관리와 분석, 콘텐츠 작업, 지식 관리까지. 프리랜서는 혼자 여러 사람의 몫을 해야 한다. 지금은 AI를 이용해 하나의 워크스페이스 안에 각 영역을 만들고, 쓸수록 시스템이 똑똑해지는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채팅에서 시작한 AI 활용이 파일 정리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채팅 그 넘어가 어디인지, 조금씩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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