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을 포기한 번역가가 바이브 코딩을 시작한 이유

by어느 번역가

코딩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대학원 전공이 경영정보시스템(MIS)이었다. 절반은 프로젝트 경영, 나머지 절반은 컴퓨터 사이언스였는데, 이 둘에 대한 내 적성은 극과 극이었다. 구조를 설계하고 단계를 나누고 의사결정을 구조화하는 일은 재밌었다. 반면 코딩은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늘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13년부터 프리랜서 번역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코딩과 담을 쌓았다. 업무에 코딩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엑셀이면 충분했다. 도구의 한계를 느끼기 전까지는 그랬다.


흩어진 것들


AI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불편이 선명해졌다. AI와 깊은 대화를 나눈 뒤 다음 세션에서 이어가려 하면 핵심 뉘앙스가 사라져 있었다. 프로젝트 일정은 엑셀로 관리하고, ESG 보고서 단어수는 또 다른 시트에서 추적하고, 블로그 아이디어는 Notion에 따로 쌓아두는 식이었다. 하나하나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전부 다른 곳에 흩어져 있었다. 도구를 오가는 것 자체가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펼쳐진 상태가 오래되면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는 그런 상태를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토대를 먼저 다지고, 그 위에서 하나씩 확장하는 방식이 나한테 맞다. 그런데 업무 도구만큼은 흩어진 채로 방치하고 있었다.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감각


작년에 AI의 도움을 받아 블로그 아이디어 자동 저장 시스템을 만들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면 GPT 액션 기능을 통해 Make를 거쳐 Notion에 저장되는 흐름이었다. 주먹구구식이었지만 작동했고, "내가 직접 만들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줬다.


올해는 접근을 바꿨다. 대학원에서 배운 프로젝트 방법론을 시작점으로 잡고, 바이브 코딩으로 구현하기로 했다. 첫 프로젝트는 AI 확대 메모리 시스템이었다. AI와의 대화에서 맥락이 자주 끊기는 문제를 해소하고, 파편화된 사고 과정을 한 곳에 축적하는 도구다.


기획부터 밟았다. 처음에는 "데이터를 어떻게 저장할까"에 집중했는데, 정리를 하다 보니 진짜 목표가 "좋은 창고"가 아니라 "나를 아는 파트너"라는 걸 깨달았다. 문제를 재정의하자 설계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용 시나리오부터 기술 스택까지 기획 항목을 순차적으로 밟아가니 MVP(핵심 기능만 갖춘 초기 버전)의 형태가 코드만 짜면 되는 수준으로 구체화됐다.


물처럼 흐르다


바이브 코딩에 들어가는 날, 솔직히 피하고 싶었다. 대학원 시절 코딩을 잘 못해서 헤매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떨림이 무색할 만큼 쉬웠다. "이런 화면 만들어줘"라고 말하면 AI가 코드를 생성하고, 에러가 나면 에러 메시지를 보여주며 수정을 요청하면 된다. 기획 단계에서 원하는 것을 충분히 정리해둔 덕분에 AI는 내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첫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 깔끔한 인터페이스를 레퍼런스로 보여주자 심플하고 깔끔한 스타일이 한 번에 나왔다. 소름이 돋았다.


저장과 검색, Notion 연동까지 모두 성공했다. 작동하는 MVP를 눈앞에 두자 예상치 못한 욕구가 올라왔다. 빨리 더 만들고 싶었다. 인보이스, ESG 보고서 관리, 흩어진 엑셀 시트들까지 전부 이 방식으로 만들어서 한 곳에 모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흩어진 것들을 모으는 일이 비로소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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