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을 넘어 전체를 보다

by어느 번역가

번역 회사와 일하다 보면 여느 조직이 그렇듯 개인은 한 부분만 맡게 된다. 번역이면 번역, 감수면 감수. 번역을 맡았다면 번역만 해서 보내면 끝이다. 품질 문제가 없다면 그 건에 대해 다시 듣는 일은 없다. 전체 프로세스에서 한 부분에만 집중하다 보니 최종 결과물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번역문이 디자인에 앉혀진 최종 결과물까지 검토하는 ESG 보고서 번역을 맡게 되면서 시야가 달라졌다.


형식이 신뢰를 만든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시작하기 전, 필수로 영작문 수업을 들어야 했다. 단순한 글짓기가 아니었다. 시카고 스타일 같은 엄격한 형식을 따라 글을 쓰는 훈련이었다. 도서관에서 스타일 매뉴얼을 빌려다가 그 규칙에 맞춰 페이퍼를 썼다. 그때 깨달았다. 미국은 형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그 경험은 이후로 계속 남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틈만 나면 저널 코너에 가서 훑어봤다. 번역 일을 시작한 뒤에는 기업 문서를 많이 다루게 됐는데, 그들이 따르는 형식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감각이 쌓였다. 형식을 갖추지 못한 글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신뢰받기 어렵다는 걸 30년간 체득한 셈이다.


지금 ESG 보고서를 번역할 때 그 감각이 고스란히 작동한다. 어떤 어휘가 공시 문서에 어울리는지, 어떤 문장 구조가 글로벌 독자에게 신뢰를 주는지, 매뉴얼을 펼치지 않아도 손이 알아서 움직인다.


공간을 미리 계산하다


ESG 보고서 작업을 하면서 마주한 현실이 있다. 한국어 보고서는 정보를 압축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그렇다. 그런데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면 길이가 1.5배까지 늘어난다. 문제는 디자인 레이아웃이 국문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나는 이 상황을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로 재정의했다. 그래서 번역 단계부터 디자인을 염두에 둔다.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번역투가 아니라 원래 영어로 쓰인 글처럼 읽히도록 신경 쓴다. 디자인 시안이 나오면 다시 검토한다. 번역할 때는 동명사가 자연스러웠는데 디자인에 앉히고 보니 명사형이 더 낫다 싶으면 수정을 제안한다. 영어는 대소문자 하나로 의미가 달라질 수 있고, 줄 바꿈 위치도 가독성에 직접 영향을 준다. 이런 부분이 오류 없이 반영되도록 하나하나 확인한다.


전체를 보니 내 역할이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권을 가지고 작업하다 보니 각 단계에 무엇이 필요한지 보이기 시작했다.


AI 번역이 넘쳐나는 지금, 번역만 해서는 가치를 주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 보고서 업무를 맡은 실무자들이 어디서 막히는지 보였다. 영어 자체가 부담인 경우도 있고, 번역본이 나와도 디자인에 얹었을 때 뭐가 맞고 틀린지 판단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았다. 번역가에게 파일을 넘기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가 더 고되다.


나는 그 짐을 나누기로 했다. 이전 연도 영문 보고서를 분석해서 용어집을 만들고, 디자인을 고려한 윤문 수준의 번역을 하고, 최종 파일까지 검토하는 과정을 스스로 설계했다.


프로세스를 설계한다는 것


돌아보니 나는 번역이라는 부분 작업을 한 게 아니었다. 한 권의 영문 보고서가 나오기까지의 흐름 전체를 설계하고 있었다.


문제를 다르게 정의하고, 각 단계를 분석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이것이 내가 프로세스 설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분에만 머물렀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전체를 조망하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야가 나를 단순한 번역가가 아닌, 고객의 문제를 함께 푸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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