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고 불합격은 과학고를 포기했을 때보다 더 아쉬웠다.
과학고는 처음부터 스스로 선택한 목표가 아니었다. 이과가 좋다는 주변의 기대를 따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준비하게 된 학교였다.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만난 친구들은 뛰어났고, 그들과 공부하다 보니 수학과 과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민족사관고등학교는 조금 달랐다.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라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이전보다 더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오랫동안 특목고 입시를 준비해 왔는데, 정작 갈 수 있는 학교가 마땅치 않았다. 일반고에 진학해야 하나 싶던 무렵, 학원에서 외고 입시를 권유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준비한 시험에 합격했다.
몇 년 동안 준비했던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급하게 준비한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뻤지만 어딘가 얼떨떨했다. 외고는 처음부터 가고 싶었던 학교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입학한 학과도 특별히 배우고 싶었던 외국어를 선택한 결과는 아니었다. 성적과 커트라인에 맞춰 정해진 선택에 가까웠다.
그렇게 세 번째 문을 열었다.
외고에 들어가니 예상했던 것과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친구들이었다.
당시에는 경기도에 살면서도 서울에 있는 외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덕분에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여러 도시에서 온 친구들이 한 교실에 모였다.
살아온 동네도, 성격도, 관심사도 달랐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공부를 꽤 잘하던 친구들이었다.
외고는 전공 외국어에 따라 학과가 나뉘었고, 같은 학과의 두 반이 3년 동안 서로 섞이며 생활했다. 덕분에 비슷한 친구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 등교해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자습했다. 주말에도 학원에 다녔다.
공부하는 시간만 놓고 보면 즐거운 생활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공부보다 친구들이 먼저 생각난다.
함께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 장난을 치고, 운동을 하고, 짧은 틈을 찾아 놀던 순간들.
하루 종일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지만, 그 안에서도 재미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일반고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상대적으로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감을 유지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지금처럼 공부에 집중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외고에서는 공부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순간에도 친구들과 함께였기에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노력은 자극이 되었고, 서로의 성장은 또 다른 동기가 되었다.
어떤 환경에 속하느냐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외고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은 좋은 성적도, 졸업장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구들이었다.
그 시절 만난 친구들 중에는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좋은 환경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학창 시절의 경쟁은 졸업과 함께 끝날 줄 알았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끝날 것 같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면 더 이상 비교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경쟁은 모습을 바꿔 계속됐다.
어느 대학에 갔는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나이가 들면서는 얼마나 벌고, 어디에 살고, 어떤 삶을 누리는지까지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누군가 직접 경쟁하자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비슷한 출발선에 섰던 친구들이기에 서로의 현재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성공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관계가 때로는 보이지 않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는 일까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도 비슷했다.
과학고 준비반에서는 과학고가 목표였고, 민사고 준비반에서는 민사고가 목표였다.
외고에 들어가서는 좋은 대학이 목표가 되었다.
언제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원했던 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 선택이 실패였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게 된다.
좋은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