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누워 있으면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천장을 보고 있다가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또 같은 천장이 보였다.
몸을 조금 움직이면 여기저기가 아팠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나가고, 휴대전화가 몇 번 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출근을 했던 2년 차 엔지니어였는데..
누군가에게 지금 다니는 회사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좋은 회사 다니네.”
맞는 말이었다.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였다. 연봉도 괜찮았고 복지도 좋았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었다.
대학생 때는 바로 그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인턴까지 했다.
인턴에 지원하기 위해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도 인턴 모집일정을 매일 체크했고,
해외배송을 통해 인적성 문제집도 주문해서 열심히 풀었다.
인턴을 했던 세 회사 중에 가장 좋은 회사였고 동료들도 좋다고 느꼈다.
그만큼 수많은 취업준비생 중 한 명이었을 때 간절하게 원했던 곳이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풀어온 문제의 답을 드디어 맞힌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답을 맞혔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회사는 지방에 있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자라 대학까지 서울에서 다녀서 지방 생활은 처음이었다.
회사 기숙사에 살았고, 아침이면 출근 버스에 올랐다.
공장에 도착하면 아침을 먹고 근무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고 현장으로 나갔다.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설비들이 공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증류탑과 배관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각종 장치들에서는 끊임없이 소음이 났다.
학교에서 배웠던 전공과목들이 실제 세상에서는 이렇게 적용되는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눈앞에 있는 설비 하나하나가 엄청난 양의 석유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작은 판단 하나가 생산량과 품질, 안전에 영향을 미쳤다.
배울 것도 많았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회사에서 필요한 것은 전혀 달랐다.
선배 엔지니어들을 따라다니며 하나씩 배웠다.
현장을 돌아다니고, 데이터를 확인하고,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았다.
정기보수를 할 때면 공장 전체를 한 달에 걸쳐 끄고 청소하고 다시 켜는데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매일 밤 자정에 가깝게 야근을 했고, 다음날은 새벽같이 출근을 했다.
그렇게 한 달간 공장 한가운데 창문도 없는 조정동 건물에서 주말도 없이 일을 하더라도
새롭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현장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분명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의문이 생겼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일을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신입사원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배우면 재미있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 차가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는 선배들이었다.
5년 차 선배가 있었고, 10년 차 선배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오래 일한 선배도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10년 뒤에도 나는 여기 있을까?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묘한 두려움이 들었다.
싫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좋은 선배들이었다.
자신이 맡은 공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정확하게 판단했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해졌다.
저 자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하면서 출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각고의 노력을 하다 보면 근근이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연명할 수는 있었겠지만,
이 일이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껴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을 잘하려면 내가 맡은 분야에 대해 계속 공부해야 했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좋은 엔지니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 다른 것들이 궁금했다.
기발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남들을 놀라게 하는 일,
프로그램이나 워크숍을 기획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주는 일
왜 어떤 조직은 잘 움직이고 어떤 조직은 그렇지 않은지.
사람들은 왜 어떤 일에는 몰입하고 어떤 일에는 그렇지 않은지.
당시에는 이런 생각들을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있는 곳보다 다른 곳이 자꾸 궁금했다.
퇴근하면 더 선명해졌다. 매주 주말 서울에 갔다.
1년 52주 중에 거의 대부분의 주말은 서울에 가기 바빴다.
서울에 출장을 가면 퇴근 후에도 만날 사람이 있었고 갈 곳이 있었다.
지방에서는 달랐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회사 동기들과 저녁을 먹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평일이 지나가고 주말이 왔다. 다시 월요일이 됐다.
다음 주도 비슷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방생활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지금 힘든 이유는 지방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모르는데, 이미 삶이 정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게 무서웠다.
지금 이 회사에 계속 다니면 3년 차가 될 것이다.
그러면 5년 차가 될 것이다.
후배가 들어오고, 직급이 올라가고, 연봉도 오를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선배들처럼 어떤 공정과 설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엔지니어가 될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미래였다.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그 미래를 상상할수록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같은 질문이 생겼다.
그런데 그게 내가 원하는 미래인가?
대답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기가 두려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다음 목표가 있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교가 목표였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이 목표였다.
대학생 때는 취업이 목표였다.
해야 할 것이 명확했다.
목표가 정해지면 꽤 집중해서 잘 달리는 사람이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찾아보고, 계획을 세우고, 부족한 것을 채우면 됐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오고 나니 처음으로 다음 문제가 주어지지 않았다.
시험도 없었다. 정답지도 없었다.
누구도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으로 직접 문제를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한 번도 그런 문제를 풀어본 적이 없었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대부분 이미 누군가 만들어놓은 문제를 열심히 풀어온 것이었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
좋은 온라인 게임.
그 문제에는 답이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으면 됐고, 합격하면 됐고, 취업하면 됐다.
그래서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무엇을 원하는가.
병실에 누워 다시 회사 생각을 했다.
몸이 나으면 퇴원할 것이다.
퇴원하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갈 것이다.
작업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고 출근할 것이다.
익숙한 사람들과 인사하고 익숙한 설비 사이를 걸을 것이다.
몇 달 뒤에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1년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아주 긴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움직인다.
대리, 과장, 부장.
조금씩 연봉이 오르고 조금씩 더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다.
그 길이 나쁜 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었다.
문제는 단 하나였다.
그 길을 가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것.
스물아홉 살의 2년 차 엔지니어는 그 질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회사를 떠나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가서 뭐 할 건데?”
하고 싶은 일이 없던 것은 아니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다른 일에 관심이 갔었다.
1년 차 때는 광고회사에 지원했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광고회사 3곳에 지원해서 1곳에 면접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면접에서 어필했던 장점들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은 한 가지였다.
'지금 가진 역량을 지금 다니고 있는 그 좋은 회사에서 펼쳐보세요~'
2년 차 때는 HR업무를 하고 싶어 십 여개 넘는 회사에 지원했고
면접장에서 우연히 채용담당자로 있는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너 미쳤어? 여길 왜 와? 그 좋은 회사 다니면서!!'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서른 살이 가까워진 시점에서야 처음 알았다.
선택지가 많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선택지는 오히려 두려움이었다.
좋은 회사에 다니는 대기업 엔지니어.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
그리고 병실에 누워 자기 삶이 마음에 드는지조차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게 어렸을 때부터 십수 년 열심히 공부해서 얻고자 했던 그토록 원하던 삶인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조금씩 분명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항상 누군가 알려줬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목적지와 방향을 직접 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