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예비남편이랑 한국 사람이지만 미국에서 자란 나는 서로 보고 느끼는 것이 달랐다. 같은 풍경이어도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그렇기에 우리 둘만의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냥 존중을 하며 각자 익숙한 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결혼 준비를 시작하기 전이라면 그렇게 다짐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각자 살아가면 된다는 말에 의구심이 번지기 시작했다. 웨딩홀 하나로 죽을 것 같이 싸우다 보니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전부 다 될 줄 알았는데, 그 속에는 밝지 않은 면도 숨어있었다.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자랐기에, 갈림길에 설 때마다 함께 의지할 기준이 부족했다. 마치 고장 난 나침반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최소한으로 우리를 한쪽으로 이끌어 줄 무언가를 갈망했다. 그것이 소속감이었을까. 그랑 조금이나마 닿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둘 사이에서 방향을 잡아줄 이정표를 필요로 했다. 결정할 때마다 환경에 휘둘리는 걸 원치 않았다.
목표는 우리를 하나로 이끌어주었다.
돈 문제로 다툴 땐 우리가 경제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을 떠올렸다.
예식장에서 뭘 할지 의견이 엇갈릴 땐 우리가 추구하는 결혼식 분위기에 집중을 했다. 이건 오빠가 내 의견을 전적으로 밀어주었다.
양가 부모님의 개입이 심할 땐 결혼식의 주인공은 우리 둘이라고 다짐하면서 잘 견뎌냈다. 자유분방하고 통제를 싫어하는 오빠가 제일 힘들어했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걱정보다 믿어달라고 수차례 부탁하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순탄히 흘러갔다.
모든 결혼 과정 속에서 한국과 미국 중 그 어느 쪽에도 지우치지 않고 중심을 유지해 왔다. 사실 모든 것을 합의하기엔 서로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달랐다. 그 중심을 우리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낸 문화는 함께 이루고 싶은 것들에서 시작되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자랐지만, 우리가 바라는 삶은 꽤 닮아있었다.
신혼집 문제는 우리의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전세라는 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몇억이나 되는 돈을 파묻어야 한다는 말에 펄쩍 뛰었다. 그것도 대출까지 받아서 말이다. 오빠는 전세가 더 유리하다고 설명했지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자가 마음에 자꾸 걸렸다.
미국에서 살았을 때 나는 월세에 매우 익숙했다. 그래서 월세로 살아도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다고 오빠를 설득했다. 다행히 우리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같아서 이야기는 잘 풀렸다.
이건 어쩌면 미국의 삶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결혼한 한국 친구들은 대부분 전세로 신혼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반대로 갔다. 부모님에게도 우리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했고, 기어코 설득해 냈다.
양가 부모님의 한복과 메이크업 준비는 그냥 전부 맡겼다. 오빠가 말하기를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체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부모 세대들을 이해해 주는 게 좋겠다고 나에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서 그러라고 했다. 물론 돈은 좀 들었지만 아깝진 않았다. 부모님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마지못해 져 주는 것도 어쩌면 사랑일지도.
축의금도 나는 돈을 주고받는다는 개념을 잘 몰라서 처음에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결혼 후에 갚아야 할 돈이라고 하니 무게감이 느껴졌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축의금과 우리가 생각하는 축의금이 너무 달라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이것도 결혼을 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고, 감사하게도 시댁에서는 받은 축의금을 고생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라며 전부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축의금에 얽힌 기대와 의무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결혼식을 마친 지금은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남았다.
미국에서 프롬파티에 갔을 때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실크 웨딩드레스만큼은 내 기억 속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살면서 내가 비너스처럼 옷을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버진로드 위를 거닐던 5월은 따스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결혼식은 결국 모든 가족이 얽혀 있는 이벤트였다. 그 속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더 힘든 날도 많을 테니 미리 연습해 보라는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온갖 잡음 속에서도 우리 둘을 위한 선택을 하는 법을 배웠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축복이 아닐까.
여기가 미국이었다면 나에겐 더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한국식으로 모든 것을 따랐다면 남편의 어깨는 활짝 펴졌을지도 모르겠다.
두 문화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게 우리 둘 만의 특권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다르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서로 자기가 살아온 게 맞다며 우기던 날로 돌아가서 나를 뜯어말리고 싶다.
오빠는 요즘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돈을 많이 모아서 미국에 자주 놀러 가자는 말을 부쩍 자주 할 뿐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이제 우리는 둘만의 언어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과 미국이 맞물린 그 어딘가에 있는, 우리 둘만이 알 수 있는 마법 같은 것.
완벽하지 않아도 어려울 때마다 우리를 지켜줄 지팡이를 깎아 다듬어 나간다. 완성되었을 땐 어떤 모습일지, 한마디 읊으면 무슨 빛이 나올까.
사랑은 고약한 마법 주문 같아서, 무심코 내뱉으면 누군가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서로에게 닿을 말을 천천히 골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