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 속 흉터

임시정부 편 (07)

by로크

상재가 살고 있는 가옥은 종로에 위치했다. 늦겨울의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에 차가운 바람이 담을 넘어 솔솔 새어 들어왔다. 차디찬 마루바닥 위에 몸을 앉힌 상재는 굳은 표정으로 누군가와 마주해 있었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월남의 서명이라면 백성들이 믿고 따를 것입니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는 YMCA 간사이자 교인들의 존경을 받는 상재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해주기를 원했다. 기독교와의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독립운동의 열기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상재는 기대에 찬 병희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난 105인 사건 때 이미 초전박살이 났소. 그런데 무슨 수로 이 일에 참여하라는 말씀이오?”


병희는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해외의 청년들이 일제에 맞서 일어서고 있습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지난 8일에는 우리 청년들이 일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제국경찰에 체포되었죠. 그런데 우리 조국에서 가만히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하나로 힘 합쳐 민족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줘야지요. 부디 힘을 보태주십시오 선생!”


간절하게 부탁하는 병희를 상재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 설명하며 에둘러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현재 기독교는 천도교처럼 돈도, 사람도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오. 의암께서 힘써주신다면은 내 기독교인들을 동원하는 데는 힘써보리다. 하지만 서명에는 참여할 수 없소.”


병희는 상재의 입장에 실망한 티를 내며 종로 가옥을 떠났다. 그가 문 너머로 나가던 중 다른 누군가와 부딪혔다. 치호였다.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병희의 시선이 치호의 왼팔에 잠시 머물렀다. 치호도 병희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병희는 치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치호는 떠나는 병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옥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를 반기는 상재에게 치호가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


“선생께도 서명을 요구하셨습니까? 저번에는 청년들이 내게 와 서명을 요청하더군요. 잘 타일러 돌려보냈습니다만,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합니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연 치호에게 상재가 답했다.


“고하로부터 광무태황제의 장례시기에 맞추어서 거사를 치룰 예정이라 들었소. 이번에도 우리 어린 동포들이 많은 피를 흘릴 것이오.”


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마루 위에 앉아 상재를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 켜켜이 쌓인 주름이 더욱 깊게 패어 보였다. 치호는 상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들은 우리가 나서면 3개월 이내에 독립이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우리 약소민족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럽의 열강이나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소요가 일본의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새로운 명분이 되겠지요.”


치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줄였다. 상재는 그런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나는 조선 땅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염려할 뿐이네.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기위해 이 박사가 힘쓰고 있어. 그는 윌슨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나. 우리에게 기적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네.”


상재의 말을 들은 치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도 정말 이번 강화회의로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고 믿으시는 겁니까? 이승만 그자는-”


치호가 순간 욱하는 감정을 가까스로 참은 뒤에 숨을 고르고 골랐다. 그의 왼팔에 통증이 아려왔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는 결과를 생각 않고 행동에 옮기는 자입니다. 지난 105인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동포들이 순사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는 동안 자신은 미국으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벌인 일들은 생각지 않구요. 저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치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팔 소매를 걷어 보이며 말했다. 그의 팔에는 105인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가 당했던 고문의 흔적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상재의 시선이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겨울의 빛이 마루의 창을 통해 들어와 그 흉터들 위에 조용히 놓였다.


치호가 소매를 내렸다. 흉터가 다시 소매 안으로 숨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해외파들에 대한 기대는 접으십시오. 우리 약소민족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한 민족의 호의를 얻어야만 합니다. 곧 있을 소요사태는 그런 호의를 무너뜨리는 것이구요. 위험하니 당분간은 몸을 피하세요.”


화를 내며 떠난 치호의 자리를 상재는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앉아 있던 마루의 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병희의 자리와 치호의 자리가 같은 마루 위에 있었다. 두 자리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담을 넘어 마루 위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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