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중독 — 잠시도 심심할 수 없었다

지루함을 못 견딘 게 아니라, 조용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by응시

이야기

그 여자의 하루에는 틈이 없었다.


눈을 뜨면 알람을 끄면서 화면을 열었다. 세수하기 전에 몇 개를 넘겼다. 지하철에서 계속 넘겼다. 엘리베이터에서 층수가 올라가는 몇 초 동안에도 꺼내 들었다. 밥을 먹을 때는 앞에 세워 두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넘겼다.


저녁에는 침대에 누워 십 분만 보려 했다. 정신을 차리면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재미있었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재미있어서 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음 것이 궁금해서 넘겼고, 넘기다 보니 시간이 갔다.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이 시시해졌다. 드라마 한 편을 앉아서 못 봤다. 초반이 느리면 참을 수 없었다. 좋아하던 노래도 후렴만 듣고 넘겼다. 바카라은 몇 줄 읽다가 손이 저절로 폰으로 갔다. 영화관에서는 앞부분이 답답해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신호가 끊겼다. 화면이 멈췄다. 몇 번이나 새로 고침을 눌렀지만 그대로였다.


그 몇 분 동안, 어머니가 사흘 전에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는 문자였다. 읽고 나서 나중에 답하려고 두었다가, 그대로 잊었다. 사흘이 지났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 몇 분을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 처음 멈칫했다.


들여다보기

의학에는 도파민 중독이라는 병명이 없다. 도파민 자체에 중독된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짧고 새로운 자극을 끝없이 찾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정확한 병명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설명하려고 붙인 이름에 가깝다.


먼저 한 가지를 바로잡아야 한다. 도파민은 흔히 즐거움을 주는 물질이라 불린다. 그러나 보상을 연구하는 쪽에서 도파민은 쾌감 자체보다, 무언가에 주의를 돌리고 그것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과 더 깊이 얽혀 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좋아함과 원함으로 갈라 부른다. 둘이 완전히 따로 도는 것은 아니지만, 갈라지는 자리가 있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원할 수 있다.


그 여자가 화면을 켠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원해서였다. 다음 것이 궁금해서 넘겼고, 넘기면 또 다음이 궁금했다. 그런데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니 재미있었냐는 물음에 답할 말이 없던 것이다.


그 여자에게 자란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다음 것을 찾는 습관이었다. 하나가 끝나기 전에 손이 이미 다음을 향했다. 그러는 동안 더디게 오는 즐거움 앞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드라마 초반을 못 견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즐거움은 대개 바로 오지 않는다. 느린 앞부분을 지나야 이야기에 들어가고, 몇 장을 읽어야 문장에 붙잡힌다. 그런데 그 더딤을 지나기 전에 손이 화면으로 돌아갔다. 세상이 통째로 재미없어진 게 아니다. 재미에 닿기 전에 빠져나오는 일이 익숙해진 것이다.


여기서 한 겹 더 내려가야 한다. 그 여자는 왜 몇 분을 못 견뎠나.


조용해지면 무언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빈자리를 물건으로 메우고, 어떤 사람은 술로 메운다. 이 여자는 메우지 않았다. 빈자리가 생길 틈부터 막았다. 틈이 생기려는 자리마다 화면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 올라오려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 여자가 못 견딘 것은 지루함만이 아니었다. 지루해지면 만나게 되는 자기 자신이었다. 사흘 지난 문자, 미뤄 둔 전화, 요즘 왜 자꾸 서운한지. 조용해지면 그런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지루함을 못 견딘 게 아니라, 조용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한 걸음 물러서서

물러서서 보면, 이 일은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화면은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이 저절로 나온다. 고를 필요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 아주 짧게 잘려 있으니 기다릴 일도 없다. 무엇을 볼지 고민하는 몇 초조차 없애 놓았다. 사람이 오래 머물수록 그것을 만든 쪽이 버니,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곧 그 일을 잘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심심함이 사라졌다.


전에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냥 서 있었다. 창밖을 보며 멍하니 갔다. 그 멍한 틈에서 나던 것들이 있었다. 어제 일이 정리되고, 잊고 있던 사람이 떠오르고, 왜 그 말이 서운했는지 알게 되고. 심심함은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저 혼자 일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없어졌다. 그런데 없어진 줄도 모른다. 잃은 자리가 늘 채워져 있으니까.


그래 놓고 세상은 절제하지 못한다고 나무란다. 하루에 몇 시간을 쓰는지 세어 보라 하고,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라 한다. 몇 초에 한 번씩 사람을 붙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는데, 못 이기는 쪽만 부끄러워진다.


그러니 혹시 지금, 화면을 내려놓고도 곧 다시 들고 있다면. 그것을 의지가 약해서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잠시도 조용해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화면과, 틈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여는 습관이 맞물린 결과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익숙해진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하나만 같이 보고 싶다. 참아 보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참는 일은 또 하나의 숙제가 될 뿐이다. 대신 잃어버린 쪽을 생각해 보고 싶다. 더디게 오는 즐거움을 기다릴 줄 아는 힘, 느린 앞부분을 지나 뒤까지 가 보는 힘. 그 힘이 돌아오면, 시시해졌다고 여겼던 것들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오늘 신호를 기다리는 몇 초, 화면을 열지 않고 그냥 서 있어 보는 것부터. 그 짧은 틈에 무엇이 다시 말을 거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