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언니가 볼펜 몇 자루를 건네주었다.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한 빛깔이 한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종이 위를 부드럽게 스치는 감촉도 좋았다. 쓸수록 손에 착 감겼다. 아껴 쓰던 볼펜 하나가 바닥을 드러내던 날, 새 볼펜을 구하려 화방을 찾았다.
“이 볼펜 있나요?”
단종되었다는 말에 아쉬워하자 주인아주머니가 “잠깐만요” 하더니 나를 진열대 한쪽으로 안내했다.
“여덟 자루 남아 있네요.”
남은 볼펜을 몽땅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무심한 듯 건넨 취향 하나가 내 손끝에 닿아 매일 아침 노트 위에 문장으로 피어난다.
오늘 아침도 ‘아침일기 15기’ 선정 도서인 《아티스트 웨이》를 곁에 두고 모닝페이지를 쓴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방에서 핑크빛 볼펜 한 자루를 집어 든다.
이 여덟 자루를 다 비워낼 때쯤이면 나는 몇 번째 글을 쓰고 있을까.
사각사각.
노트 위에 마음을 써 내려간다.
문득 곁에 둔 수필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힐링’을 다룬 글을 읽다가 나만의 힐링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예순을 넘긴 지금, 흘러가는 시간을 감사히 누리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요즘 나에게 가장 필요한 힐링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볼펜을 선물해 준 소영 언니와 백화점 2층, 시계탑이 보이는 소파에 앉아 긴 시간을 보냈다.
언니는 늘 꼿꼿하고 활력이 넘쳤다. “언니는 나보다 몸이 훨씬 젊어요” 하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지하철에서도 자리를 마다하고 서 있기를 좋아했다.
그런 언니가 그날따라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눕고 싶다.”
“언니, 몸이 아픈데 누구 눈치를 봐.”
괜찮다면서도 소파에 몸을 뉘는 언니를 바라보니 마음이 아팠다.
지친 언니의 얼굴 위로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겹쳤다. 당당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낯선 노인이 되어버렸듯, 나이 듦은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가방 속 세네카의 바카라을 꺼내 언니에게 읽어주었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도 시간도 실은 어디선가 잠시 빌려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젊음이라는 계절을 지나며 당연한 듯 누려온 건강도 영원히 내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씩 쇠해가는 몸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언니에게 건넨 말이었지만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나 역시 빌려온 것들을 하나씩 돌려주어야 한다. 건강도, 시간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날들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 아껴 쓰고 싶다. 그렇다고 아까워 서랍 속에 넣어두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길을 걷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며 기꺼이 다 써버리고 싶다.
아껴두기만 하면 볼펜은 끝내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못하니까.
오늘 아침도 핑크빛 볼펜을 집어 든다.
언젠가 이 여덟 자루도 하나씩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빈 볼펜을 바라보며 아쉬워하기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참 많이 썼구나.
참 잘 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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