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따라가는 길 ⑦

기다려야 맛이 난다

by신은정



몬딱신문에서 김창현의 「커피 한잔의 인문기행」을 읽다가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커피가 한 번에 모든 맛을 내어주지 않듯, 좋은 드립도 그 맛이 차례로 피어날 시간을 기다려 주는 일입니다.”

이 문장은 오래전 드립커피를 배우던 날로 나를 데려갔다.

지금은 태재제빵소가 들어선 자리에 예전에는 세련된 커피 공간이 있었다. 한쪽에서는 커피를 마셨고, 다른 한쪽에서는 강의가 열렸다. 어느 날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드립커피 특강 안내를 보았다. 세 번에 걸쳐 진행되는 짧은 수업이었다.

그 무렵 나는 커피 맛이 궁금했다. 카페에서 “예가체프로 주세요”, “케냐로 주세요” 하고 주문하는 언니가 왠지 멋져 보였다. 나도 커피를 조금은 알고 싶어 특강을 신청했다.

나이도 하는 일도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 하나는 같았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몇몇과는 한동안 연락하며 지냈다. 지금은 모두 시절인연으로 남았다.

그 수업에서 같은 원두, 같은 온도의 물, 같은 드리퍼와 주전자로 한 잔씩 내려 나누어 마셨다.

맛이 모두 달랐다.

누군가의 잔에서는 향이 풍부했고, 누군가의 잔에서는 쓴맛이 더 진했다. 조건은 같았지만 물을 붓는 속도와 양, 기다리는 시간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집에서 드립커피를 내려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제는 맛있었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원두도 물도 그대로인데 어떤 날은 향긋하고, 어떤 날은 쓰거나 밋밋하다.

드립커피를 배우며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4:6 추출법’이었다. 물을 앞의 40퍼센트와 뒤의 60퍼센트로 나누어 붓는 방식이다. 앞부분은 맛의 균형을, 뒷부분은 농도를 잡는다.

같은 원두, 같은 물이라도 붓는 방식과 기다리는 시간에 따라 맛은 달라진다.

커피는 생각보다 섬세했다.

물을 붓고 기다린다.
다시 붓고 또 기다린다.

한꺼번에 모든 맛을 얻으려 하지 않고 커피가 제맛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린다. 그것이 드립커피였다.

집에서 커피를 내릴 때면 종이 필터 한 장을 꺼낸다. 너무 익숙해 별생각 없이 쓰지만, 이 작은 종이에도 이야기가 있다. 번거로움을 덜고 싶었던 멜리타 벤츠의 궁리에서 종이 필터는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작은 불편함에서 시작된 생각이 오랜 시간을 건너와 이제는 우리 일상에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필터를 한 장 꺼낼 때면 가끔 생각한다.

참 고마운 한 장이라고.

커피를 알아갈수록 좋은 커피를 내리는 곳도 궁금해졌다. 가보고 싶던 커피숍을 하나씩 찾아 나섰다. 그중 한 곳이 안산의 바르바커피 타워360이었다.



들어서자 1인 1주문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이미 빵을 잔뜩 샀으니 커피는 조금 덜 주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커피 한 잔에 8,800원. 선뜻 내기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갈까 망설이다 높은 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앉아 있는 공간이 아주 천천히 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줄도 몰랐다. 바닥에 보이던 글씨가 조금씩 멀어지고 나서야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창밖을 보니 조금 전까지 있던 풍경은 비켜나고 다른 풍경이 와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밖은 점점 어두워졌다. 멀리까지 보이던 풍경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는 낮에 와야겠네.”

언니가 말했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워는 여전히 천천히 돌고 있었지만 이제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풍경보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타워도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조금씩 돌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조금씩 움직이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루하루의 변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힘들기만 했던 일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시간이 되어 있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간 줄 알았던 일이 새로운 길의 시작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날 우리는 타워가 360도를 다 도는 동안 머물지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에는 바깥 풍경 대신 우리의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밖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는,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드립커피도 한꺼번에 모든 맛을 내어주지 않는다. 물을 붓고 기다리고, 다시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원두가 품은 맛이 차례로 나온다.

우리의 시간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좋은 날인지 알 수 없는 날이 있다. 지나고 나서야 그 시간이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알게 된다.

그날 타워에서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듯, 내 삶에도 아직 만나지 못한 풍경이 남아 있을 것이다.

기다려야 맛이 나는 커피처럼,
우리에게도 기다려야 알게 되는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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