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아닌 커피, 오르조
커피를 마시고 잠을 설쳤다는 사람이 주변에 하나둘 늘어난다.
“커피 한 잔 마셨더니 밤새 잠을 못 잤어.”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 사람도 어느 순간부터 커피를 마시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하루 한 잔씩 꼬박꼬박 커피를 마셨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줄이면서 다른 음료를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커피를 덜 마신다고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금 멀어지고 나니 오히려 커피를 둘러싼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온라인카지노에서 커피에 관한 연재를 읽었다. 방탄커피 이야기도, 하삼동커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글을 따라가다 낯선 이름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오르조 커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이미 알고 있는 이도 있었다. 나만 몰랐나 싶어 찾아보니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오르조는 커피가 아니었다. ‘오르조(orzo)’는 이탈리아어로 보리를 뜻한다. 보리를 볶아 커피처럼 마시는 음료다. 커피콩이 들어가지 않아 카페인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보리를 볶아 커피 대신 마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다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된 뒤에도 오르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커피를 대신하던 음료가 사람들의 일상에 남았다.
이야기를 알고 나니 맛이 궁금해졌다.
커피처럼 진할까.
보리차처럼 구수할까.
보리가 과연 커피 맛을 낼 수 있을까.
커피를 좋아하면서도 잠 때문에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맛이 괜찮다면 한 통씩 선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마셔보기로 했다.
딸에게 부탁해 오르조를 주문했다. 며칠 뒤 노란 통이 도착했다. 뚜껑을 열자 고운 갈색 가루가 가득했다. 색만 보면 인스턴트커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찬장 안쪽에 넣어두었던 커피잔을 꺼냈다. 찻숟가락으로 수북하게 두 숟갈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갈색 가루가 금세 녹았다. 잔에 담긴 색은 제법 커피처럼 보였다.
한 모금 마셨다.
‘음…….’
커피 맛은 아니었다. 진하게 볶은 곡물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구수한 맛에 가까웠다.
‘나만 커피 맛을 못 느끼나?’
마침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나오던 남편에게 물었다.
“이거 한번 마셔볼래?”
남편도 한 모금 마셨다.
“숭늉 마시는 기분인데.”
웃음이 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잔을 들어 다시 마셔보았다. 남편 말대로 구수했다. 색은 커피와 닮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커피의 맛과 향은 아니었다.
나에게 오르조는 한 번 맛본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카페인이 부담스럽지만 커피를 마시는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반가운 음료가 될 수도 있다.
오르조를 마시고 나니 뜻밖의 궁금증이 생겼다.
‘진짜 커피 맛은 어떤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커피를 마셨다. 하루 한 잔이 일상이던 때도 있었다. 향이 좋다, 쓰다, 고소하다 정도로 느끼며 마셨을 뿐이다. 원두 한 알이 어떤 시간을 지나 내 잔에 담기는지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어디에서 자랐는지, 어떻게 볶았는지, 언제 갈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내렸는지에 따라 커피의 맛과 향은 달라진다.
커피를 오래 마셨지만 정작 나는 그 맛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오르조에서 시작한 길이 다시 커피로 돌아왔다.
쓴맛 뒤에 숨어 있는 단맛은 어떤 맛일까. 원두마다 산미는 어떻게 다를까.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커피의 향은 무엇일까.
하나씩 궁금해진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커피잔을 깨끗이 씻어 찬장 맨 앞에 놓는다.
오르조 한 잔 덕분에 커피가 다시 궁금해졌다.
이제 커피의 진짜 맛을 하나씩 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