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을 읽어보다 ④

여전히 새잎을 피웁니다

by신은정


경애와의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아쉬웠지만, 둘째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오래 못 본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을 것이다.


대신 온라인카지노에 5분 글을 올렸다. 아침 창밖에서 다급하게 지저귀던 새소리를 떠올리며 쓴 글이었다.



요즘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읽고 있다.
"무조건 써라."
글이 쓰레기 같다고 느껴져도 그 순간을 적으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도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잘 쓰려 하기보다 그냥 쓰기로 했다.


그때 오랜만에 동생 연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뭐 해?"
워낙 바쁜 아이라 반가웠다.

약속을 잡으려 했는데 내가 톡을 늦게 보는 바람에, 수원에 사는 언니와 먼저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괜찮으면 같이 봐요."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보내준 주소를 따라 광주 문형산로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동네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건물이 들어서고 마을은 제법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블레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런 곳에 이런 카페가 있었나 싶었다. 손님은 아직 없었다. 안쪽에는 고양이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었고,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장님이 고양이들과 놀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창 너머 고양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후배가 도착했고, 우리는 의자를 붙여 나란히 앉았다.



카페는 목사님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는 후배의 마음이 전해졌다.


다음 일정이 있어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다음 날 인천 문학야구경기장에 가기로 했는데 비 예보가 마음에 걸렸다. 비가 오면 경기가 취소될 수도 있었다.


생일 모임을 함께하는 분이 야구 경기 티켓을 구해 주셨다. 태어나 한 번도 야구장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경기보다도 그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과 열기를 직접 느껴 보고 싶었다.
마침 오늘도 경기를 볼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간은 빠듯했다.
사실 집으로 돌아가 막 도착한 가주 작가님의 《여전히 새잎을 피웁니다》를 펼쳐 들고 싶었다. 바카라도 좋았고 야구장도 좋았다. 그저 오늘이라는 하루가 야구장 쪽으로 나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서둘러 소영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걸었지만 끝내 닿지 않았다. 함께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을 안은 채 혼자 인천으로 향했다.



태어나 처음 가보는 야구장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객석으로 올라가니, 경기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질서정연하게 울려 퍼지는 응원 소리가 열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내 자리는 G13, 14, 15.
좌석마다 번호가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의자 앞에는 음식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달려 있었다.


치킨과 피자, 맥주, 라면, 커피까지 저마다 취향대로 준비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야구 유니폼을 맞춰 입은 사람들도 많았고, 커다란 선풍기와 태블릿까지 챙겨 온 모습을 보니 이곳을 자주 찾는 이들인 듯했다.



야구장에는 몰랐던 문화도 있었다. 배달 음식을 시키면 좌석까지 가져다주었고, 카드 한 장으로 무엇이든 간편하게 결제했다. 경기장 안은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야구를 보는 곳이라기보다, 하루를 즐기는 문화 공간에 가까웠다.


나는 야구를 거의 모른다. 경기 규칙도, 우리나라 프로야구 팀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


기아 타이거즈와 SSG 랜더스.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날 처음 들었다.


전광판에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응원가가 울려 퍼졌고, 수많은 응원봉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하나의 공연 같았다.


처음에는 경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야구장을 찾은 사람들이 먼저 보였다.


친구와 함께 온 사람,

가족과 함께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가족과 함께 온 아버지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사 오느라 분주했다.



경기장 안에는 음식점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미리 통닭을 사 온 것이 괜히 아쉬웠다.


옆자리의 젊은 여성도 한참 응원에 집중하다가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줄 알았는데, 거의 한 시간 만에 친구들과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반가웠다.


두 시간이 지나자 나도 조금씩 경기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함께 응원하고 환호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그 열기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선수들의 움직임도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 경험한 야구장은 예상보다 훨씬 뜨겁고 활기찼다.
차가 막힐 것 같아 경기가 끝나기 조금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는 응원가가 맴돌았고, 처음 만난 야구장의 열기는 오래도록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밤이 깊어 있었다.
기다리던 《여전히 새잎을 피웁니다》를 펼쳤다. 야구장의 함성을 마음에 품은 채,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낮에는 사람들의 열기 속에서 하루를 채우고, 밤에는 한 권의 바카라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전히 새잎을 피웁니다》.
바카라 제목처럼, 나도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작은 새잎 하나를 피워 낸 것만 같았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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