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클랜드 말벡 vs 트라피체 브로켈 말벡
와인 초보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다. 수백 병이 진열된 매장에서 아무거나 집어 들 용기 말고, 무엇을 사야 할지 아는 데서 나오는 용기.
다행히 와인에는 꽤 쓸 만한 공식이 있다. 와인용 포도 품종에 따라서 성장하기 좋은 기후, 토양 조건이 다르다. 우리는 거기에 맞는 국가를 기억하면 된다.
아르헨티나는 말벡, 미국은 카베르네 소비뇽, 호주는 시라즈, 뉴질랜드는 소비뇽 블랑, 스페인은 템프라니요. 독일 리즐링 이다. 여섯가지만 기억해도 와인 매대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줄어든다. 조금 더 욕심내면 미국 나파 밸리의 카베르네 소비뇽, 호주 바로사 밸리의 시라즈, 뉴질랜드 말보로의 소비뇽 블랑, 스페인 리오하의 템프라니요 정도만 알아두자.(포도 산지명이 세분화될수록 고급이다. 압구정 산다고 하지 서울 산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프랑스는 어떠냐고? 프랑스는 거의 모든 포도 품종을 잘 다룬다. 유일하게 잘 다루지 못하는 게 있다면 가격이다. 특히 부르고뉴는 와인을 사기도 전에 숙취가 온다. 카드 명세서를 보는 순간부터다.
피노 누아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돈이 없다면 당분간 피노 누아는 조심하시라. 내 나름의 원칙은 5만 원 이하 피노 누아를 일단 의심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칠레와 뉴질랜드에는 훌륭한 저가 피노 누아도 있다. 다만 그 예외를 찾겠다며 여러 병을 마시다 보면 처음부터 5만 원짜리를 사는 게 저렴했을 수도 있다.
자, 이제 아르헨티나로 가보자. 정확히는 코스트코로!
말벡은 원래 프랑스 출신이다. 남서부 카오르에서 오랫동안 재배됐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된 건 아르헨티나에 건너가 서다. 프랑스에선 조연이던 포도가 남미에서 주연을 맡았다.
주 무대는 멘도사다. 안데스산맥 동쪽의 건조하고 햇볕 좋은 땅. 높은 고도와 큰 일교차, 안데스산맥에서 녹아내리는 눈이 포도를 키운다.
이곳에서 자란 말벡은 대체로 검은 체리와 잘 익은 자두, 블랙베리 같은 진한 과실향을 보여준다. 타닌도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다. 레드 와인은 묵직해야 하지만 입안에 사포질 하는 기분은 싫다는 사람에게 적당하다.
이런 말벡을 경험하는 데 비행기 표는 필요 없다. 코스트코 회원카드면 된다.
커클랜드 시그니처는 휴지부터 견과류, 보드카까지 안 만드는 게 없다. 와인 애호가 중에는 커클랜드 와인을 저렴한 마트 PB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름난 샤토도 아니고 가격도 싸다. 와인 애호가 세계에는 간판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주황빛 안데스산맥이 그려진 이 말벡은 조금 다르다.
커클랜드 시그니처 멘도사 말벡. 가격은 12,990원.
잔에 따르면 잘 익은 자두와 검은 과실, 은은한 오크의 풍미를 기대할 수 있다. 묵직하지만 지나치게 부담스럽지 않은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 와인,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뒷라벨에서 발견한 이름은 브로켈 와이너리(Broquel Winery). 그리고 와인메이커 세르히오 카세(Sergio Casé).
그리고 놀랍게도 브로켈 말벡이라는 와인이 따로 있다. 트라피체(Trapiche)는 1883년 설립된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와이너리다. 브로켈은 트라피체의 와인 라인이고, 커클랜드 말벡도 여기서 만들어진다.
마트 PB 와인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140년 넘은 명문가 출신 서자였다.
물론 족보가 좋다고 와인까지 좋은 건 아니다. 명문대 졸업생이라고 모두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니까.
둘 다 트라피체에서 말벡을 써서 만든 와인이지만 같은 와인은 아니다. 코스트코 말벡은 멘도사 전역에서 포도를 조달하였고 브로켈말벡은 멘도자 중에서도 우코밸리의 포도만 썼다. 멘도자의 압구정이랄까? 오크배럴 숙성 기간도 3개월 더 길다.
가격을 보자. 커클랜드는 12,990원, 브로켈은 국내마트 할인가 대략 2만 원 내외에 판매된다. 약 7,000원 차이다.
가성비와인으로는 두 와인 모두 적극 추천이다. 가능하면 두 병을 사서 동시에 오픈하여 비교해 보자. 병을 가리고, 같은 잔에 같은 온도로 따라보자. 과실향과 타닌, 여운에서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 보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는 미세하게 브로켈 말벡이 아로마가 더 복합적으로 느껴지고 구조감이 탄탄했다. 브로켈이 확실히 더 좋다면 7,000원을 더 내면 된다.
그런데 차이를 모르겠다면? 그냥 싼 거 마시시라.
차이를 알면 돈을 더 쓰고, 차이를 모르면 돈을 아끼자.
여기는 샤또 가성비.
그랑 크뤼 말고, 그랑 행복.
매주 한 병, 당신의 지갑을 대신해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