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원에 초대한 품격 있는 남자
와인 라벨에 갑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 한 손에는 지휘봉을 들었다. 표정은 근엄하고 시선은 단호하다.
이탈리아 산 펠리체(San Felice)의 일 그리지오(Il Grigio). 끼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 와인이다.
라벨에 그려진 인물은 누구일까. 그리고 와이너리는 왜 이 그림을 선택했을까.
아버지는 갑옷을 입고, 아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르네상스의 거장 티치아노(Titian)다. 1530년 무렵 완성된 「갑옷 입은 남자」는 현재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 속 인물은 티치아노의 아버지, 그레고리오 베첼리오로 추정된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 카도레 지역에서 민병대를 지휘했다. 다만 실제로 그의 초상화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속 남자는 자신의 초상화가 먼 훗날 와인 매대에 진열되리라고 상상했을까.
일 그리지오의 이름에는 단서가 있다. 이탈리아어 grigio는 회색을 뜻한다. 머리카락에 사용하면 희끗희끗한, 백발의라는 의미가 된다. 산 펠리체의 미국 상표 등록 기록에도 ‘백발의 남자(The Grey Haired Man)’라는 해석이 등장한다.
그림 속 기사의 백발과 와인의 이름이 연결된다. 산 펠리체는 왜 하필 이 그림을 선택했을까. 생산자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일 그리지오를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 소개하며 티치아노의 초상화를 언급한다.
백발은 세월과 경험을, 갑옷과 지휘봉은 권위를 떠올리게 한다. 오랜 숙성을 거치는 리제르바의 이미지와도 어울린다.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와인에 문화적 깊이를 더한다.
이름과 그림, 와인의 성격이 하나의 인상을 만든다. 의도된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수많은 와인 라벨 사이에서 이 남자의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일 그리지오의 고향은 이탈리아 토스카나다.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펼쳐진 언덕 지대, 끼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에서 생산된다.
이 지역을 상징하는 문양은 검은 수탉이다. 갈로 네로(Gallo Nero)라고 부른다. 중세 피렌체와 시에나의 영토 분쟁을 둘러싼 수탉과 기사의 전설에서 유래했다.
끼안티 클라시코는 일반 끼안티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DOCG다. DOCG는 포도 품종과 생산 지역, 양조 방식 등에 규정을 두는 이탈리아의 원산지 명칭 제도다.
핵심 품종은 산지오베제(Sangiovese). 끼안티 클라시코에는 최소 80%를 사용해야 한다. 일 그리지오는 산지오베제만으로 만든다.
산지오베제는 체리와 붉은 과실의 풍미, 선명한 산도와 뚜렷한 타닌이 특징이다. 끼안티 클라시코의 비교적 높은 포도밭은 산도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
이런 와인은 음식과 만났을 때 강점을 드러낸다. 토마토소스 파스타나 구운 고기와 특히 잘 어울린다.
일 그리지오에는 리제르바(Riserva)라는 이름이 붙는다. 끼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는 최소 24개월의 숙성이 필요하다. 일반 끼안티 클라시코보다 긴 시간을 거쳐 출시된다. 숙성 기간이 길다고 무조건 더 좋은 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산 펠리체의 공식 테크니컬 시트에 따르면 일 그리지오는 산지오베제 100%로 양조한다. 말로락틱 발효(MLF)를 거친 뒤 대형 슬라보니아산 오크통과 작은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큰 오크통은 나무 향의 영향을 비교적 완만하게 전달한다. 작은 오크통은 오크의 풍미를 더 뚜렷하게 남길 수 있다.
생산자가 설명하는 향은 제비꽃과 야생 붉은 베리류다. 입안에서는 선명한 산도와 탄탄한 타닌이 와인의 중심을 잡는다.
2024년 미국의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일 그리지오 2021 빈티지를 그해 Top 100 와인 중 24위로 선정했다. 평점은 93점. 당시 미국 기준 가격은 28달러였다. Top 100은 평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품질과 가격 대비 가치, 유통량, 화제성 등을 함께 고려한다.
와인을 고를 때 더 중요한 것은 잔에 담긴 품질과 지불할 가격이다. 마트 할인가로 3만 원 이내에 구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성비 있는 선택이다. 산지오베제의 개성과 끼안티 클라시코 리제르바의 특징을 부담 없이 경험할 수 있다.
500년 전 그림의 주인공을 식탁에 초대하는 데 3만 원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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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서 맛있는 건 자랑이 아니다.
그랑 크뤼 말고, 그랑 행복.
와인 공식 자료
산 펠리체 일 그리지오 (San Felice Il Grigio Chianti Classico Riserva)
•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anfelice.com/en/product/il-grigio-riserva-1
• 공식 테크니컬 시트 (2021): https://admin.sanfelice.com/app/uploads/2023/04/SF-IlGrigioCCRisDocg-2021-EN.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