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원으로 마시는 호주 와인 산업혁명
돈을 많이 쓰지 않고도 제법 괜찮은 와인을 고르고 싶다면 호주를 기억해 두시라. 특히 묵직한 레드 와인을 좋아한다면 더 그렇다. 프랑스가 포도밭의 역사와 가문의 전통을 설명하는 동안 호주는 조금 다른 문제에 몰두했다. 좋은 와인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더 안정적으로, 더 싸게 만들 수 있을까.
물론 호주 와인도 역사가 깊다. 19세기부터 포도를 재배했으니 어지간한 기업보다 오래됐다. 다만 오늘날의 호주 와인을 만든 것은 오래된 포도나무만이 아니다. 상당 부분은 농업기술과 제조업의 발전이었다.
1960년대 호주 와인 산업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농업 연구기관들이 기계식 포도 수확과 전정 기술을 발전시켰고, 와이너리에는 스테인리스 발효조와 온도 조절 기술이 도입됐다.
포도를 사람이 일일이 따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넓은 땅에 대규모 포도밭을 조성할 수 있었고, 발효 과정도 보다 정밀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됐다. 포도밭에서는 재배 효율을, 와이너리에서는 품질의 일관성을 높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에 풍부한 일조량이 더해졌다. 따뜻한 산지에서는 포도가 충분히 익어 농밀한 과실 풍미를 내기 좋다. 관개시설과 재배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면 건조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인 생산을 도모할 수 있다.
물론 호주 전체가 기후 좋은 자동화 농장인 것은 아니다. 폭염과 가뭄도 있고, 오래된 포도나무를 손으로 관리하는 생산자도 많다. 특히 고급 와인 생산은 여전히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호주는 현대적인 재배와 양조, 규모의 경제를 통해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러운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발전시켜 왔다.
프랑스가 테루아의 가치를 설명하는 동안 호주는 생산 공정도 열심히 개선한 셈이다. 물론 양쪽 모두 좋은 와인을 만든다. 차이가 있다면 소비자는 대개 후자의 성과를 할인 매대에서 체감한다는 것이다.
좋은 와인을 만드는 기술과 싸게 만드는 기술은 다르다. 호주는 두 가지를 꽤 잘 결합했다.
호주 쉬라즈를 이야기하면서 바로사 밸리를 빼놓을 수 없다. 남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북동쪽으로 떨어진 이곳은 호주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1840년대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프로이센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그중 크리스티안 아우리히트라는 대장장이는 1843년 자신의 땅에 쉬라즈 포도나무를 심었다. 놀랍게도 그때 심은 포도나무 일부가 지금도 살아 있다.
유럽의 수많은 포도밭을 파괴했던 필록세라가 이 지역에는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랑마일의 ‘더 프리덤 1843’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쉬라즈 포도밭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대장장이가 심은 포도가 180년이 지나 고급 와인이 됐다. 쇠를 두드리던 사람이 포도나무로 더 오래 이름을 남긴 셈이다.
바로사는 따뜻하고 건조한 여름, 풍부한 햇볕, 다양한 토양을 바탕으로 농밀한 쉬라즈를 생산한다. 잘 익은 자두와 블랙베리, 초콜릿과 향신료의 풍미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북부 론의 시라가 절제된 과실과 후추, 허브의 매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면, 바로사 쉬라즈는 조금 더 풍성하고 화려한 쪽이다.
물론 바로사의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고급 와인은 비싸다. 오래된 나무일수록 수확량이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대규모 기계화의 경제성이 이런 희귀한 포도밭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사에는 전통적인 명품 와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호의 생산자 그랜트 버지(Grant Burge)의 역사도 재미있다.
1865년 메샥 버지는 창고에 발효 탱크를 설치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눠줄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세대를 거쳐 와인을 만드는 가업으로 발전했다.
1988년 그랜트 버지는 아내 헬렌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이후 바로사의 대표적인 와인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이 집안은 상당히 비싼 와인도 만든다.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메샥 쉬라즈가 대표적이다. 반면 좀 더 일상적으로 마시기 좋은 와인도 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잉크(Ink) 시리즈다.
같은 생산자가 고급 맞춤 정장과 편하게 입을 청바지를 함께 만드는 셈이다. 오늘은 청바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정장은 다음에 월급이 많이 오르면 생각해 보자.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잘 만나면 2만 원 내외, 비싸도 3만원 안으로 구할 수 있다.
이름부터 잉크다. 잔에 따르면 짙은 보랏빛이 인상적이다. 생산자 설명에 따르면 과실 풍미가 풍부한 와인들을 블렌딩하고, 포도에서 추출한 천연 색소 성분을 사용해 색감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 색깔 하나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진한 색과 달리 맛은 꽤 친절하다. 잘 익은 자두와 붉은 과실의 풍미, 부드러운 타닌, 둥근 질감이 특징이다. 의외로 오크의 존재감은 강하지 않다. 복잡한 숙성향을 찾아 헤매기보다 풍성한 과실을 편하게 즐기는 쪽이다.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기 좋다. 맛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잉크시리즈의 쿠나와라 카르베네 소비뇽을 더 좋아한다.
잉크 시리즈에는 바로사 쉬라즈 외에도 맥라렌 베일 쉬라즈와 쿠나와라 카베르네 소비뇽 등이 있다. 모두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쿠나와라 잉크다.
쿠나와라는 바로사보다 상대적으로 서늘한 기후와 붉은 테라로사 토양으로 유명하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대표적인 산지로 검은 과실과 허브, 민트 계열의 풍미가 특징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한 이유는 민트와 유칼립투스를 연상시키는 고급 와인 뉘앙스가 느껴져서다. 생산자의 공식 테이스팅 노트에도 블랙커런트, 초콜릿 민트, 시더우드가 등장한다.
이 향에는 과학적인 배경도 있다. 호주의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유래한 시네올이라는 성분이 인근 포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그렇다고 쿠나와라의 붉은 토양에서 민트향이 솟아난다는 뜻은 아니다. 포도밭 주변 식생과 재배·양조 환경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2만 원 안팎의 와인에서 이런 개성 있는 뉘앙스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랜트 버지의 잉크 시리즈를 다시 보게 된 이유다.
그렇다면 왜 쿠나와라가 아니라 바로사를 추천하느냐고?
내 취향과 남에게 추천하기 좋은 와인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쿠나와라의 허브와 민트향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반면 바로사는 진한 과실향과 부드러운 질감으로 훨씬 친숙하게 다가온다.
애매하면 이거 사시라
저녁에 호주산 소고기를 구웠다. 와인 한 병이 필요한데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 손님 취향도 모르겠고, 예산은 2만 원 정도다. 실패하면 괜히 기분이 나쁘다.
그럴 때 나는 바로사 잉크를 고른다.
묵직하고 풍부한 과실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후회할 가능성이 낮다. 구운 고기류, 피자와도 잘 어울린다. 물론 가벼운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사람에게까지 권할 생각은 없다. 그건 취향의 문제다.
한 병에 대단한 감동이 필요한 날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녁에는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와인 한 병이면 충분하다.
그랜트 버지는 바로사에서 160년 가까이 쌓인 가문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급 와인부터 대중적인 와인까지 만들어 왔다. 그중 2만 원 안팎에서 이런 풍부한 맛을 즐길 수 있다면 반가운 일이다.
여기는 샤또 가성비.
그랑 크뤼 말고, 그랑 행복.
매주 한 병, 당신의 지갑을 대신해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