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발견한 프랑스의 양심
가성비 와인 카지노 게임을 시작하며 첫마디부터 모순이다. 싼 와인부터 마시지 마시라. 사기꾼 같겠지만 잠시만 들어보시라. 여기에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철학이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하다. 와인에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은 끝에 얻은, 제법 비싼 교훈이다.
와인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나는 어느 정도 가격과 품질이 보장되는 와인을 마셔보라고 권한다. 와인은 단순히 포도로 만든 술이 아니다. 피노 누아의 섬세함, 카베르네 소비뇽의 단단한 구조감, 시라의 스파이시한 매력, 리슬링의 짜릿한 산도까지. 포도 품종과 산지, 양조 방식에 따라 수백 가지 뉘앙스를 가진다. 이런 다양한 캐릭터를 경험하려면 우선 기본기가 탄탄한 와인으로 시작하는 편이 도움이 된다.
사격에 앞서 영점을 조준하듯 우리의 혀에도 기준점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만 마시면 어떤 것이 품종 본연의 개성이고, 어떤 것이 와인의 결함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반대로 잘 만든 와인들을 경험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입맛의 영점이 잡힌다. 비싼 와인 앞에서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고, 저렴한 와인 앞에서도 감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돈이다. 와인에 빠질수록 통장 잔고는 놀라운 속도로 증발한다. 보르도의 샤토들은 수백 년 동안 명성을 쌓았지만, 내 월급은 한 달을 버티기도 벅차다. 로마네 콩티를 사랑하지만 그쪽에서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방적인 사랑은 원래 돈이 많이 드는 법이다.
그렇다고 몇만 원짜리 와인을 일상적으로 마실 형편도 아니다. 일주일에 두 병씩 5만 원짜리 와인을 마시면 한 달에 40만 원이다. 와인이 취미인지 적금 해지 사유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저렴한 와인을 아무거나 집어 들 수는 없다. 대체로 가격이 내려갈수록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한 와인을 골라내기가 어려워진다. 과실의 집중도, 산도와 타닌의 균형, 향의 복합성 등에서 아쉬움이 나타나기 쉽다.
하지만 어렵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가격표를 잘못 붙인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와인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WSET Level 3라는 제법 그럴듯한 자격증도 취득했고, 품종과 산지, 양조법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무엇보다 수많은 와인을 마시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실패한 와인은 어찌했느냐고? 웬만하면 끝까지 마셨다. 학문적 열정이라기보다 매몰비용을 포기하지 못하는 온라인 게임인의 슬픈 습성이었다.
이렇게 쌓은 지식과 경험으로 누구나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와인 중에서도 기본기가 충실한 녀석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 카지노 게임의 목적은 단순히 싼 와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비싼 와인을 싸게 파는 곳을 찾는 게 아니라, 싼 가격에도 좋은 와인의 자격을 갖췄다고 판단할 만한 녀석을 찾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을 소개한다.
편의점에서 발견한 프랑스의 양심, 앙시앙땅 까베르네 시라 (Anciens Temps Cabernet Syrah)
와인 좀 마신다는 사람에게 프랑스 와인은 특별하다. 보르도, 부르고뉴, 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제는 가격표를 보면 심장이 다른 의미로 두근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남부 랑그독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다.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와 다양한 토양을 바탕으로 개성 있는 와인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보르도와 부르고뉴만큼의 화려한 명성이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유명세에 지불할 비용을 덜어내고, 와인 자체의 품질을 살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앙시앙땅은 랑그독 지역 와인으로 소개되는 레드 와인이다. 이름은 프랑스어로 ‘옛 시절’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오래된 시간의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지만, 실제 가격은 비교적 부담이 적은 편에 속한다.
품종 구성은 카베르네 소비뇽 50%, 시라 50%다. 일반적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은 구조감과 타닌을, 시라는 검붉은 과실과 향신료 계열의 풍미를 더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와인의 느낌은 빈티지, 수확 시기, 양조 방식과 보관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이 비율만으로 맛을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품종이 만나 균형을 이루는 셈이다. 마치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 결혼해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포도끼리는 생활비 문제로 다투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양조·숙성 방식에 대해서는 판매처와 수입사 자료에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활용한 발효 및 초기 숙성, 프렌치 오크에서 약 6개월간 숙성했다는 설명이 확인된다. 다만 해당 정보가 모든 빈티지와 생산 로트에 동일하게 적용되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프렌치 오크 숙성으로 완성도를 높였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오크 숙성에서 비롯될 수 있는 향과 질감이 제품의 특징으로 소개된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검붉은 과실, 블루베리와 라즈베리 계열의 베리 향, 백후추와 허브 뉘앙스, 바닐라와 오크 풍미가 느껴진다. 입안에서는 과실 풍미와 부드러운 타닌이 어우러지는 스타일이다.
복합적인 숙성향이 끝없이 펼쳐지는 고숙성 와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십수 년 묵은 보르도처럼 한 잔을 들고 인생을 회고하게 만들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퇴근 후 삼겹살을 굽는데 굳이 나폴레옹 시대의 기후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는 법이다.
이 와인의 장점으로는 비교적 낮은 가격대에서 과실 풍미와 타닌, 오크 계열의 뉘앙스를 함께 경험하는점을 들 수 있다. 다만 ‘기본적인 균형이 뛰어나다’거나 ‘입문자에게 적합하다’는 평가는 실제 시음자의 취향과 빈티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레드 와인의 구조를 익히는 데 참고할 만한 선택지일 수 있고, 부담 없는 데일리 와인을 찾는 사람에게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편이 적절하다.
편의점, 마트에서 1만 원대 중후반으로 판매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와인을 좋아한다. 대단한 족보를 내세우지도, 화려한 가격표로 기선을 제압하지도 않는다. 그저 잔에 따라 마셔보면 ‘어라, 이 가격에?’라는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다. 앙시앙땅은 바로 그런 범주에 넣어볼 만한 와인이다.
이 카지노 게임에서 소개할 와인들이 모두 앙시앙땅과 같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와인은 더 섬세할 것이고, 어떤 와인은 더 풍성할 것이다. 다만 공통점은 하나다. 가성비!
좋은 와인을 경험해 입맛의 영점을 잡았다면, 이제 그 기준을 들고 저렴한 와인들 사이에서 보물을 찾아볼 차례다. 유명한 샤토도, 고급 레스토랑도 필요 없다. 때로는 동네 편의점의 평범한 진열대가 우리의 포도밭이 된다.
로마네 콩티를 매일 마시는 인생도 좋겠지만, 1만 원대 와인을 마시며 ‘내가 제법 잘 골랐군’ 하고 흡족해하는 인생도 꽤 괜찮지 않은가.
여기 샤또 가성비에서
그랑 크뤼 말고, 그랑 행복.
매주 한 병, 당신의 지갑을 대신해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