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 진리는 단순하고, 삶은 이토록 쉽다

삶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

by이상옥
연꽃03-1.jpg

세상의 모든 것은 진리대로 잘 되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 잘못되는 일은 없다.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지라도, 괴로운 일은 없다. 괴롭다는 해석이 있을 뿐.

- 법상 스님 /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 -




1. 우주에 우연이라는 점(點)은 없다

왜 어떤 사람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출근길에 다리가 끊어져 죽어야 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마침 2달러짜리 지폐를 주으려 허리를 굽힌 순간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가 목숨을 건지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오후의 지하철 안에서 예상치 못한 화재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를 어쩌다 일어난 일이라 부르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우연이란 없다.


길을 가다가 2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았다고 치자. 그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하필이면 바로 그 시간에 그 공간을 지나갔으며, 위의 사람은 하필 그 찰나에 화분을 떨어뜨렸겠는가. 이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문제를 넘어, 크고 작은 인과 속에서 수많은 실타래가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는 필연의 결과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거대한 인과의 그물망 속에서 정교하게 움직인다.


2. 40년 세월이 복각한 소유욕

내가 누리는 취미 중에 음악감상이 있다. 아름다운 선율에서 위로와 기쁨을 얻는 일이야 누구나 좋아하겠지만, 취미의 영역으로 깊어지면 좋아하는 장르와 음악가가 생기고, 결국 더 좋은 음질을 위해 오디오에 관심을 두게 마련이다. 내가 딱 그렇다.


학창 시절 좋아하던 팝송부터,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들려주신 가곡에 매료되어 '비목'과 '목련화'에 꽂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감성이 그 어느 때보다 풍부했던 그 시절엔 음질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길거리 좌판에서 파는 저렴한 카세트테이프도, 일반 공테이프에 스스로 라디오 음악을 녹음해 듣던 소리도 그저 좋았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삶의 여유가 생기면서 기왕이면 더 좋은 음질로 듣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예산에 맞춰 하나둘 장만하다 보니 집에 오디오 기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즐겨 신고 다니는 신발이 한두 켤레가 아니듯, 오디오에 대한 소유욕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다행히 내 분수를 넘어서 무리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리 비싼 기기라도 현장에서 직접 듣는 생음악에는 비할 수 없기에, 나는 늘 적절한 수준에서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왔다.


3. 청음 매장에서 마주한 오감(五感)의 배신

최근 약간의 여윳돈이 생기면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앰프와 스피커를 새로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처음 오디오에 입문할 당시 예산 부족으로 차선바카라을 택해야 했던, 그래서 가슴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전설적인 제품들을 찾아보았다. 마침 40년의 세월을 넘어 새롭게 재현된 복각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아련한 감성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1980년대 초반, 크기는 작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구동 기회를 주지 않았던 전설적인 북셀프 스피커 'AE1'의 40주년 한정판 복각 제품을 한 조 들였다. 시장에 풀린 모양새를 보니 제작사의 상술임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그 시절 동경하던 전설을 마침내 내 공간에 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스피커 재고가 블랙밖에 남지 않아 색상은 블랙으로 결정되었다.


AE03.jpg[1908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Acoustic Energy AE1의 출시 당시와 40주년 복각품]


이제 이 스피커에 맞는 앰프를 고를 차례였다. 내가 점찍은 것은 1960년에 처음 출시되어 무려 6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 복각된 '쿼드(Quad) 33, 303' 모델이었다. 디자인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앙증맞은 크기에 파워앰프가 좌우 두 개로 분리되는 '모노블록' 형태로 진화한 제품이었다. 상당한 고가였지만 다행히 예산 범위 안에는 들어왔다. 마음을 거의 굳힌 상태에서 최종 확인을 위해 직접 매장을 방문했다.


쿼드04.jpg[1960년대 후반 출시되어 뉴욕 MoMA에 전시될 정도로 디자인 뛰어난 쿼드 앰프]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순간, 기대했던 감성이 오지 않았다. 오디오라는 취미는 청각뿐만 아니라 시각과 촉각 등 인간의 오감을 종합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영역인데, 쿼드는 내 오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실망감에 젖어 매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뜻밖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80년대 초반에 시각적으로 내 눈을 사로잡았던 '사이러스 원'의 감성을 복각해 만든 '미션(Mission) 778X'였다.


미션02.jpg[미션 사이러스 원 출시 당시 기사와 현재의 미션 778X]


가격은 원래 사려던 쿼드 앰프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저렴했다. 게다가 내장형 DAC, 블루투스, USB, 포노앰프까지 웬만한 현대적 기능이 다 포함된 실용성이 돋보였고, 직관적이고 심플한 만듦새와 손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터치감까지 내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었고, 이틀 뒤 물건이 집에 도착했다.


4. 아뿔사! 블랙 스피커와 실버 앰프

드디어 택배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즐거운 마음으로 언박싱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자를 열자마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뿔사, 내가 주문한 블랙이 아니라 번쩍이는 '실버' 제품이 배달된 것이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깊은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걸 포장해서 반송하고 다시 택배로 받으려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이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그냥 써야 하나?' 내가 블랙 앰프를 주문했던 유일한 이유는 먼저 산 복각 스피커의 색상이 블랙이었기 때문이다. 스피커조차 재고가 블랙밖에 없어 산 것이었기에, 완벽한 색상 조화(깔맞춤)를 위해 선택한 블랙 앰프였다. 그런데 내 앞에 덩그러니 놓인 것은 실버라니.


택배 상자 앞에서 한 5분에서 10분 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반송하지 않고 그냥 쓰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엉뚱한 오배송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5. 파도는 갈라져도 바다는 하나다

비록 복각 제품이지만 40년이 지나 내 손에 'AE1' 스피커가 들어온 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블랙 색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애당초 선택한 쿼드가 아닌 미션으로 바낀것도, 그리고 스피커 색상에 맞추기 위해 신중하게 고른 '미션 778X' 앰프가 주문과 다르게 '실버'로 날아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저 이 실버 앰프가 어떻게든 나와 인연을 맺으려고 온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때' 나와 만나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내게 일어난 수많은 사건과 내 손을 거쳐 간 물건들 역시, 분명히 내게 일어나야만 했고 꼭 만나야만 했던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나를 돕기 위한 우주의 거대한 의도이자 절대자의 마음을 품고 내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내 삶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타인이 대신 선택해 준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품고 있는 내 깊은 영혼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내 안의 절대자, 즉 나라는 '전체성'이 그 존재와 사건과 물건을 마주하도록 이끈 것이다.




바다 위에 인연 따라 온갖 파도가 몰아치지만 파도의 본질은 결국 하나의 바다이다. 이처럼 현실의 온갖 사건과 존재들은 전부 파도와 같아서, 삼라만상 전체가 '한마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잠시 피어난 물보라일 뿐이다. 그러니 내 삶에 어떤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다. 전부 한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진리의 일이다. 절대자가 움직이는 거대한 세상에서, 혹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펼쳐지는 일일 뿐이다.


부자, 돈, 명예, 권력, 지위 등 우리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 또한 내가 원한다고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것이 아니라 제 인연 따라 오고갈 뿐이다. 우리는 그 인연이 언제쯤 올지 언제쯤 갈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집착해 봐야 소용이 없다. 집착하면 그저 나만 괴로울 뿐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실버 앰프 앞에서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힘을 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에는 기적 같은 평온이 찾아온다. 아니, 본래 내 안에 있던 완전한 진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문서와 다른 색상의 앰프를 안방에 들이며, 나는 육조 혜능 스님의 위대한 깨달음을 비로소 온몸으로 감각한다.


‘자성(自性)이 이토록 본래 청정했다니! 이토록 모자람 없이 완전했다니! 이토록 본래 흔들림이 없었다니! 이토록 온 세상을 만들어냈다니! 이토록 본래 생겨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었다니!’

- 육조 혜능 스님 -




이전 20화[일] 생각의 크기가 그릇의 크기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