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상에 앉아 일기를 쓰는 아이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으신가요?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이내 지우개로 종이가 찢어질 듯 빡빡 문지르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한 문장을 채 쓰기도 전에 지우고, 또 지우고. 결국 까맣게 번진 일기장 위에는 누구나 쓸 법한 뻔하고 안전한 두어 줄의 문장만 남습니다. "오늘 OO에 갔다. 참 재미있었다."
우리는 흔히 아이가 쓸 말이 없어서 글쓰기를 힘들어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실과 가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생각이 틀렸을까 봐' 두려울 뿐입니다.
빨간펜의 공포, 다름을 '틀림'으로 배우는 교실
언제부터 우리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적는 일기장 앞에서조차 자기검열을 하게 된 걸까요?
우리의 교육은 아주 오랫동안 정답을 찾아내는 훈련이었습니다. 수학 문제에도 정답이 있고, 국어 지문 속 주인공의 감정을 묻는 문제에도 출제자가 정해놓은 유일한 정답이 있습니다.
조금만 엉뚱한 대답을 하거나 맞춤법이 틀리면 어김없이 어른들의 '빨간펜'이 그어집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곧 '틀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내 진짜 속마음을 썼다가 엄마가 실망하면 어쩌지? 선생님이 맞춤법이 다 틀렸다고 혼내면 어쩌지? 결국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반짝이는 생각들을 지우개로 빡빡 밀어버립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정답에 가장 가까운 모범 답안 뒤로 숨어버리죠.
지저분한 일기장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
진정한 의미의 '사고력 글쓰기'는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뽑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칠고 파편화된 생각들을 밖으로 쏟아내고, 그것들을 요리조리 연결해 보며 나만의 논리를 만들어가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맞춤법이 완벽하고 글씨가 반듯한 뻔한 일기장보다, 맞춤법은 다 틀렸어도 외계인이나 좀비가 등장하는 엉뚱하고 지저분한 일기장이 훨씬 더 가치 있습니다.
지우개 가루가 수북이 쌓인 깔끔한 백지보다, 검은 연필 자국으로 가득 찬 낙서장이 아이의 뇌가 훨씬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답이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글쓰기마저 정답을 맞춰야 하는 숨 막히는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멋진 글솜씨를 가르쳐주는 논술 학원이 아니라, "네 생각은 절대 틀리지 않아"라고 말해주는 '안전한 글쓰기 환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