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의 정원

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13화

by아이작 유

비는 모든 실존하는 것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 작정인 듯 무겁게 쏟아졌다. 사라가 운전하는 은색 승용차는 모든 디지털 신호를 죽인 채 ‘고스트 모드’로 어둠 속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차 안에는 지독한 침묵과 함께, 누군가의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매트 위로 스며드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뒷좌석에 앉은 세호는 옆자리에 잠든 마리의 손을 꼭 쥐었다.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것은 현실의 감촉이었지만, 세호의 머릿속은 여전히 픽셀 단위로 붕괴하던 가상 세계의 잔상으로 어지러웠다.


“저기다.”


운전석 옆의 벤 리가 낮게 읊조렸다. 그가 가리킨 곳은 도심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닿지 않는, 버려진 인쇄소 건물이었다. 차가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육중한 강철 셔터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셔터가 닫히는 소리는 마치 세상과의 영원한 단절을 선언하는 금속성 비명처럼 들렸다.


지하 창고의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오래된 진공관 라디오가 내뿜는 비릿한 열기와 낡은 종이 냄새였다. 그곳 중심에는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고 회중시계를 조율하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은퇴한 노인이라기보다, 멈춰버린 시간의 톱니바퀴를 홀로 돌리고 있는 기괴한 시계공처럼 보였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벤. 자네가 내 평온한 정원을 망치러 올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이나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올 줄은 몰랐네.”


노인의 목소리는 건조한 모래알이 굴러가는 듯했다. 벤 리는 부상당한 팔을 감싸 쥔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아니, 얼마 전 우리 아카이브가 처음 뚫렸을 때 이미 예감했어. 내부에 누군가 쥐새끼가 있다는 걸. 그래서 사이트릭스의 눈을 피해 자네에게 미리 연선을 넣었던 걸세. 마리와 이 아이를 위해 시스템이 닿지 않는 ‘진짜 현실’의 구멍이 필요했어.”


세호는 곁에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현실의 육체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가상 세계에서 보았던 그녀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모습이 세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호는 노인을 향해 절규하듯 물었다.


“마리는… 사이트릭스 속의 마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노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세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진정하게, 젊은이. 자네가 걱정하는 ‘가상 세계의 마리’는 이미 우리 대원들이 고스트 네트워크를 통해 안전하게 이곳 아카이브로 인계했네. 자네 곁에 있는 건 그녀의 진짜 육체고, 그녀의 의식은 지금 저기 놓인 서버 안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지. 현실과 가상의 링크는 완벽하게 보호되고 있네.”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세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주름진 눈가 너머로 깊은 채색의 눈빛이 감돌았다.


“자,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나. 현실의 둔탁한 침대 옆에 서서 그녀의 빈 껍데기만 바라봐봐야 자네 마음만 타들어 갈 뿐이지. 자, 그럼 ‘고스트 정원’으로 가보도록 하지. 소개할 우리 대원들도 있고, 마리의 진짜 의식과도 제대로 인사를 나누어야 하지 않겠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대원들을 하나하나 지목했다.


“자, 인사나 나누게. 이곳에선 나를 그냥 ‘노인’이라 부르면 되네. 이름 같은 건 데이터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지. 그리고 내 아이들일세. 저기 구석에서 쉴 새 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건 ‘모스’, 모든 암호를 가루로 만드는 녀석이지. 그 옆에서 총기를 정비하는 친구는 ‘블라인드’, 우리 팀의 눈이자 보이지 않는 사신이야. 그리고 자네들을 치료해줄 ‘케어’와 ‘샌드’지. 우리는 이름 대신 역할로 실존하네.”


세호는 노인의 안내를 받아 마리가 누워있는 의료용 침대 곁으로 향했다. ‘케어’가 정교한 장비로 마리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케어는 세호를 보더니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벤 리 님이 말씀하신 게 정말이었군요. 마리 님이 품고 있는 이 아이…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현실의 심장 박동과 가상의 비트가 완벽하게 일치하며 공명하고 있어요. 마치 두 세계의 코드를 하나로 묶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아요. 사이트릭스가 왜 그토록 이 생명을 두려워하고 집착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노인은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베니 굿맨의 클라리넷 연주가 우아하게 흘러나왔다. 도심을 태우던 화염과 피 냄새는 이제 아주 먼 기억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식어버린 차라도 한 잔 마시게.”


노인이 머그컵을 내밀며 덧붙였다.


“이곳 ‘고스트의 정원’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지. 하지만 잊지 말게. 이 정적인 평화는 진이 자신의 생명을 깎아 바친 대가로 얻은 아주 짧은 유예일 뿐이야. 밖에서는 여전히 사이트릭스가 자네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데이터로 치환해 추적하고 있네.”


세호는 차가운 찻잔을 쥐며 자신의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만져보았다. 현실의 몸에는 어디에도 상처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기온이 낮아지면, 사이트릭스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틈새에서 얻은 가상의 통증이 유령처럼 되살아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남긴 그 '데이터의 흔적'은, 차가운 공기를 타고 뇌의 가장 깊숙한 곳을 날카로운 바늘처럼 찔러왔다. 그것은 마치 다가올 거대한 파멸을 예고하는 불길한 복선처럼, 세호의 의식을 현실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현실의 통증에 매몰되지 마세요.”


정적을 깨고 케어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구식 엔트리스 기어의 전극을 소독용 알코올로 닦아내며 덧붙였다.


“그 환상통은 뇌가 기억하는 에러 메시지일 뿐이에요. 시스템이 당신의 감각을 해킹해서 공포를 주입하는 거죠. 여기서 몸을 추스르는 동안 의식은 우리 쪽 아카이브로 옮기겠습니다. 육체의 회복 속도보다 의식의 동기화가 더 급하니까요. 자, 다들 준비하세요.”


노인이 낡은 레버 형 스위치를 올리자 지하 공간의 조명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어두워졌고, 거대한 서버 랙들이 낮은 웅웅거림을 내뿜으며 깨어났다. 세호는 케어가 건넨 묵직한 엔트리스 헬멧을 썼다. 눈을 감자 차가운 젤의 감촉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잠시 후, 망막 너머로 하얀 노이즈가 폭발하듯 번졌고, 세상은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노인의 아카이브는 현실의 낡은 인쇄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온실 같았다. 천장에는 디지털로 구현된 밤하늘이 눈이 시릴 만큼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은빛 코드로 이루어진 이끼들이 부드럽게 발을 감쌌다. 벤 리와 사라가 각자의 아바타로 형상화되어 세호의 곁에 섰다. 그들의 모습은 현실보다 더 선명했고, 이곳의 공기는 마치 갓 구워낸 빵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데이터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온실의 가장 깊숙한 곳, 투명한 데이터 스트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분수대 앞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마리.”


세호의 목소리가 가상 세계의 공기를 가늘게 떨게 했다. 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의 재회였다. 사이트릭스의 차가운 감옥에서 보았던 창백하고 비참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곳의 그녀는 부드러운 호박색 빛에 휩싸여, 마치 세상을 다 품은 여신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현실의 육체보다 더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배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눈에 띄게 더 불룩해져 있었다. 얇은 리넨 원피스 위로 드러난 그 곡선은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고 묵직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 살아있는 것 이상의 거대한 에너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이의 박동이 일정한 주기로 마리의 배 위로 푸른색 파동을 일으켰고, 그 파동이 퍼져 나갈 때마다 주변의 코드 이끼들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춤을 추었다.


세호는 마리의 배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단순한 태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억 개의 코드가 초당 수조 번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전율에 가까운 우주의 노래였다.


“세호 씨, 느껴지나요? 우리 아이예요. 정말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 않아요?”


마리는 세호의 당혹감을 읽은 듯,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세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세호는 마리의 배 주위로 흐르는 기묘한 빛의 소용돌이를 보았다. 벤 리가 말했던 그 ‘신비로움’은 이곳 가상 세계에서 더욱 압도적인 형태로 실재하고 있었다. 마치 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이 닫힌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사이트릭스 전체의 구조가 뒤바뀔 것만 같은 서늘한 예감이 세호를 덮쳤다.


세호는 마리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기묘한 진동에 숨을 멈췄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이 꿈틀대는 태동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박동은 마치 수억 개의 은하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내지르는 비명 같았고, 동시에 아주 정교하게 조율된 기계 시계가 초를 짓이기며 나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세호의 망막 위로 디지털 노이즈가 아닌, 태초의 빛과 같은 순수한 데이터의 광휘가 스쳐 지나갔다.


“우리 아이… 정말로 살아있군요.”


세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마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아카이브의 밤하늘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지만, 그 너머에는 인간의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리는 세호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자기 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호 씨, 사이트릭스의 계산대로라면 이 아이는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이래요.”


마리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빗소리가 섞인 바람이 온실의 투명한 벽을 두드렸다.


“어떻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아이가 숨을 쉴 때마다, 내가 알던 모든 질서가 조금씩 부서지는 게 느껴져요. 마치 이 아이 자체가 이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틀린 답’인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세호 씨, 그게 너무나도 선명해서 무서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섞여 묘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세호는 마리의 배를 응시했다. 리넨 원피스 위로 푸른빛의 파동이 일렁일 때마다, 아카이브를 감싸고 있던 은빛 이끼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 파동은 세호의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현실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던 환상통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마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호의 품으로 기댔다. 그녀의 몸은 가상 세계의 아바타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보다 더 묵직한 질량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느다란 뼈의 감촉,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향기. 모든 것이 지독하게 구체적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마리. 당신이 사라진 뒤로 나는 단 한 순간도 현실의 바닥을 딛고 서 본 적이 없어요. 내가 걷는 모든 길이 픽셀처럼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세호의 고백에 마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등 너머로 보이는 온실의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든 전원이 꺼지면 사라질 전구의 빛처럼 위태로웠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겪은 그 지독한 고독을. 하지만 세호 씨,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에요. 노인님이 말씀하셨듯, 이 아이의 박동이 우리를 하나의 궤도로 끌어당긴 거예요. 사이트릭스의 알고리즘이 아무리 우리를 찢어놓으려 해도, 이 아이가 만들어내는 이 ‘고유한 시공간’만큼은 침범하지 못해요.”


멀리서 노인이 파이프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타지 않는 불꽃이 그의 주름진 눈가에서 명멸할 때마다 아카이브의 전력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감동적인 재회군. 하지만 감상은 그쯤 해두는 게 좋겠어.”


노인이 연기를 내뿜으며 다가왔다. 그 연기는 가상의 데이터임에도 불구하고 코끝을 찌르는 독한 향나무 냄새를 풍겼다.


“이 아이의 코드는 이미 자가 증식 단계에 들어섰네. 매 초마다 사이트릭스의 메인 프레임에 치명적인 공명을 보내고 있지. 그건 마치 거대한 도서관 한복판에서 사이렌을 울리는 것과 같아.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트릭스의 스니프나 리트리버, 심지어 이곳 모든 마을마다 침투해 있는 에이전트 끄나풀인 ‘그레이’들 또한 하이에나처럼 자네의 좌표를 향해 논리적 비약을 시도하고 있을 걸세.”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세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네, 고향 친구 때문에 사이트릭스에 들어오지 않았나? 잠깐 뒷조사해서 미안하네만, 요즘 자네 친구 같은 그레이들이 사이트릭스에서 활개 치는 게 좀 문제일세. 그들은 시스템의 하수인이면서도 여전히 평범한 인간을 흉내 내지. 그게 가장 위험한 거야.”


벤 리가 팔의 부상을 만지며 노인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의 아바타는 현실보다 조금 더 단단해 보였지만, 눈빛에 서린 피로함은 감출 수 없었다.


“노인,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시간이라… 이곳의 시간은 의미가 없네. 다만, 저 아이가 태어날 준비를 마칠 때가 바로 이 전쟁의 종착역이 되겠지. 그때까지 자네들이 저 아이의 의식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야.”


세호는 마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배는 이제 아카이브 전체의 빛을 흡수하듯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윽…!”


마리가 갑자기 상체를 뒤틀며 세호의 손을 부서질 듯 꽉 쥐었다.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이마에는 차가운 데이터의 땀방울이 노이즈처럼 맺혔다. 단순한 진통이 아니었다. 그녀의 배 안쪽에서 시작된 푸른 광휘가 리넨 원피스를 뚫고 나와 아카이브의 대기를 날카롭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마리! 정신 차려요! 마리!”


세호가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아이의 박동이 만들어내는 파동이 세호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다. 그것은 보호를 바라는 연약한 생명의 신호가 아니었다. 쿵, 쿵, 쿵. 일정한 박자로 터져 나오는 파동은 마치 거대한 성벽을 부수는 공성퇴처럼 아카이브의 가상 공간을 타격했다.


“이게 무슨…!”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던 모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카이브를 가득 채웠던 수천 개의 브라운관들이 일제히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화면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빛 기호들이 이끼처럼 피어올랐다. 노인의 아카이브 전체가 마치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난 지진의 여파를 맞은 것처럼 위태롭고 기분 나쁘게 흔들렸다.


“노인, 로그를 좀 봐요. 이건 평범한 태동이 아니야. 파형이… 살아있어.”


모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노인이 단말기로 다가갔다. 화면 위로 흐르는 데이터의 수식들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지만, 그 궤적은 지독하게 정교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이 아이… 사이트릭스의 네트워크망을 흔들고 있군.”


노인의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세호의 귀에 박혔다. 아이의 박동이 일정한 주기로 고동칠 때마다, 화면 구석에 표시된 사이트릭스의 거대한 지도가 아주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것은 폭발적인 파괴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아주 느리고 꾸준한 파문을 만들어내듯, 아이는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부드러운 침식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스템의 논리를 아주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사이트릭스 메인 프레임의 데이터 블록 중 아주 일부분이 원인 불명의 노이즈와 함께 아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그 형체를 잃어가는 중이었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야.”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이 아이는 존재 자체로 시스템에 대한 아주 은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의 질서와 가벼운 마찰을 시작한 거야. 마치 아주 날카로운 바늘이 겹겹이 쌓인 비단 천을 천천히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말일세.”


아이가 내뿜는 파동은 이제 아카이브의 경계를 넘어 외부 세계로 아주 가느다랗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는 아니었지만, 한밤중 정막을 깨는 시계 바늘 소리처럼 시스템의 심장부를 향해 아주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벤 리는 마리와 세호,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일렁이는 기묘한 푸른 광휘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아카이브의 경계면, 보이지 않는 데이터의 벽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지점에 머물렀다. 부상당한 그의 팔 주위로 낮은 전압의 노이즈가 일렁였지만, 벤 리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직감이군. 아니, 이미 그들의 레이더에 잡혔을 거야.”


벤 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비릿한 데이터의 타는 냄새를 맡으며 노인을 향해 물었다.


“노인, 오랜만에 준비되었나? 아이의 존재가 사이트릭스에 실질적인 위협이 된다면, 저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이 위협의 신호를 포착한 순간, 사이트릭스는 자신들의 모든 리소스를 쏟아부어 엄청난 파상공세를 펼치겠지. 우리가 여태껏 겪어온 수준의 추격이 아닐 거야. 이건 시스템 전체가 벌이는 거대한 거부 반응이자 숙청이 될 테니까.”


노인은 대답 대신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재떨이에 가볍게 두드려 재를 털어냈다. 그러고는 낡은 조종간 옆에 놓인 투박한 구식 레버를 움켜쥐었다.


“준비라… 그런 건 내 사전에 지워본 적 없는 단어지. 다만, 저 아이가 보내는 저 신호가 저토록이나 투명할 줄은 몰랐군. 사이트릭스 놈들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도서관 대출 목록 사이에 끼어든 정체 모를 연애편지 같은 걸 거야.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반드시 찾아내서 불태워야만 하는 오점이지.”


노인이 레버를 당기자 아카이브의 구석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구식 방어 알고리즘들이 무거운 기계음을 내며 기지개를 켰다. 은빛 이끼들이 돋아나던 바닥 아래로 거대한 방열판들이 열리며 데이터의 과부하를 견뎌낼 준비를 마쳤다.


“자네 말대로일세, 벤. 저들은 이제 단순히 사냥개들을 보내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 거야. 시스템은 저 아이를 자신들의 근간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변종으로 규정했네. 이제 곧 이곳 마을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스니프들과 리트리버들이 몰려오겠지. 그리고…”


[윙— 윙—]


정적을 깨고 세호의 주머니 속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울렸다. 가상 세계인 사이트릭스 내에서만 새겨졌던 그 보이지 않는 상처의 기억처럼, 현실의 진동 역시 세호의 뇌를 직접 건드리는 듯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세호! 안 돼, 보지 마! 절대 보지 말라고!”


벤 리가 눈을 번뜩이며 비명처럼 경고했다. 하지만 벤 리의 외침은 세호의 손가락보다 찰나의 순간 늦었다. 세호는 이미 홀린 듯 손을 뻗어 망막 위로 메시지를 눌러 띄운 뒤였다.


“세호야, 너 어디야? 며칠째 연락이 안 된다고 주변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난리야. 나도 너네 집 근처까지 가봤는데 아무도 없더라.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니지? 이 문자 보면 바로 연락줘. 내가 도와줄게.”


성준의 문자는 끈질기게 세호의 시야 한구석에 머물며 깜빡였다. ‘연락이 안 된다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한다’는 문장은 세호가 잊고 지냈던 현실의 발등을 차갑게 적셨다. 어쩌면 성준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해서 이 모든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성준이가… 저를 찾고 있어요. 도울 게 없냐고 묻는데… 이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요.”


세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리의 배 속에서 아이가 다시 한 번 움츠러들며 푸른 파동을 내보냈다. 마치 성준의 문자가 가져온 ‘현실의 유혹’에 아이가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그게 바로 그레이들이 자네를 낚아올리는 방식이야.”


노인이 식어버린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읊조렸다.


“가장 다정한 얼굴로,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간단하고 쉬운 전략이지. 그 아주 쉬운 속임수에 홀랑 말려들어서는 문자를 열어버렸군. 자네가 그 일상에 흔들려 버튼을 누른 그 짧은 찰나, 저 밖에서 하이에나처럼 웅크리고 있던 파상공세의 물결이 이미 이 아카이브의 좌표를 낚아채고 밀려들기 시작했을 걸세.”


세호는 성준의 이름이 적힌 메시지 창과 마리의 평온한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카이브의 천장을 덮고 있던 방음 벽면 위로 기분 나쁜 붉은색 경고 신호가 피투성이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친구의 간절한 목소리는 구원의 밧줄이 아니라, 자신들을 포위망 한복판으로 끌어당긴 차가운 낚싯줄이었음이 뒤늦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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