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12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호의 입안에서는 지독하게 비린 금속 맛이 났다. 그것은 아카이브가 붕괴할 때 맛보았던 데이터의 파편인지, 아니면 과부하로 터져버린 잇몸의 실핏줄이 터져 나온 결과물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상과 현실은 이미 낡은 외투의 안감처럼 뒤섞여 있었으니까. 세호는 땀과 이름 모를 냉각 젤로 축축하게 젖은 엔트리스 기어의 전극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기계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살갗이 찢기는 듯한 미세한 통증이 뒤따랐다.
오피스텔 안은 비현실적일 만큼 고요했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네온사인은 여전히 무심하고 화려했다. 그 빛들은 수만 개의 바늘이 되어 창문을 통과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카이브에서 겪은 폭발의 잔상이 망막에 화인처럼 남아, 그가 응시하는 사물마다 지직거리는 디지털 노이즈가 덧씌워졌다. 벽에 걸린 시계도, 반쯤 열린 냉장고도, 마치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데이터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때, 거실 테이블 위에서 스마트폰이 벌레처럼 진동했다. 화면에는 번호도, 이름도, 그 어떤 식별 기호도 없었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세호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귀에 대기도 전, 벤 리의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세호, 지금 당장 창 밖으로 뛰어내려. 질문은 생략한다.”
세호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현관 복도 너머에서 “경찰입니다!”라는 억센 외침과 함께 육중한 강철 문이 비명을 지르며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방문이라기보다, 거대한 포식자가 먹잇감의 껍질을 벗겨내는 파괴음에 가까웠다.
세호는 본능적으로 창문을 열었다. 3층. 인간이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기에는 조금 높고, 죽음을 각오하기에는 애매한 높이였다. 하지만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방충망을 미친 듯이 뜯어내고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커헉!”
다행히 추락 지점은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었다. 수거되지 않은 대형 쓰레기 봉투들이 겹겹이 쌓인 골목의 구석이었다. 쓰레기 봉투들이 완충 작용을 하며 그의 목숨을 구했지만, 어깨와 옆구리를 타고 올라오는 둔탁하고 묵직한 통증은 피할 수 없었다. 세호는 폐 속에 고여 있던 탁한 공기를 한꺼번에 뱉어내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골목 입구로 나서자마자 차가운 기계음이 밤을 갈랐다. 검은 세단 세 대가 타이어 타는 냄새와 매연을 내뿜으며 세호를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로 에워쌌다. 차 문이 열리고 짙은 수트를 입은 사내들이 내리려 했다. 그들의 얼굴은 도심의 그림자처럼 어둡고, 표정은 공장에서 찍어낸 부품처럼 거세되어 있었다. 그들이 세호의 팔을 낚아채려던 찰나, 골목 끝에서 1톤 트럭 한 대가 미친 짐승처럼 굉음을 내며 돌진했다.
콰아앙—!
트럭은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강철의 의지 그 자체였다. 트럭은 세단 세 대를 연쇄적으로 들이받으며 엉망으로 뭉개버렸다. 차체가 찢겨나가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유리 파편이 튀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찌그러진 엔진룸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를 뚫고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내린 것은 현실의 벤 리였다.
그는 가상 세계에서의 중후한 리더와는 달리 조금 더 마르고, 조금 더 지친 인상을 풍겼지만, 눈빛만은 픽셀의 광휘보다 훨씬 선명했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세호를 거칠게 낚아채듯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 여기서 꾸물대면 자네의 영혼까지 사이트릭스에 회수당할 거야!”
벤 리는 부축이라기보다 거의 바닥에서 세호를 끌어당기듯 데리고 사거리로 질주했다. 뭉개진 세단에서 기어 나온 요원들이 비틀거리며 총을 꺼내 들었지만, 벤 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때맞춰 사거리 코너를 급하게 돌아온 은색 승용차 한 대가 타이어 비명을 지르며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평소의 나른하고 몽환적인 표정 대신, 굶주린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는 사라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 창문을 내리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타요! 지금 이 구역 전체의 트래픽이 통제되고 있어요. 30초 뒤면 퇴로가 완전히 차단돼요!”
세호는 거의 뒷좌석에 내동댕이쳐지듯 몸을 던졌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사라가 가속 페달을 바닥 끝까지 짓밟았다. 차는 비명을 지르며 도심의 밤공기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뒤편에서 요원들의 고함과 급정거 소리가 멀어졌다. 세호는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벤 리 님, 마리는요? 마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구역도 털린 건가요?”
세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벤 리는 조수석 대시보드 위에서 묵직한 검은 상자 하나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돌멩이처럼 딱딱했다.
“진이 방금 마리의 빌라 외벽을 타고 침투했어. 마침내 마리와 접촉한 것 같군.”
벤 리는 조수석에 앉아 무릎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위로는 복잡한 격자무늬의 지도와 끊임없이 점멸하는 녹색 점들이 흐르고 있었다. 벤 리의 목소리에는 팀원들에 대한 지독하리만치 견고한 신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단단한 가죽 소파처럼, 세월의 풍파를 견대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묵직한 종류의 것이었다.
“진이 마리에게 ‘리커시브 링크’를 장착하는 데 성공했어. 이제 마리가 현실의 물리적인 도주 중이라 해도 사이트릭스와의 접속은 끊어지지 않을 거야. 의식의 끈이 가상 세계의 고스트 네트워크에 영구적으로 인계된 거지. 지금쯤 진은 마리를 데리고 빌라 뒷길을 통해 가장 어두운 경로로 도망치고 있을 거네. 카일이 그들의 발밑에 그림자로 된 퇴로를 깔아주고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벤 리의 말은 공허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낮은 저음의 첼로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 시각, 도심 반대편의 낡은 시립 병원. 산소호흡기의 규칙적이고 메마른 쌕쌕거림과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운 독방에서, 카일의 눈동자는 전혀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목 아래로 모든 감각이 거세된 그의 육체는 하얀 시트 위에 한 구의 미라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를 잊어버린 낡은 도서관의 폐기 도서처럼 고요하고 비참했다. 매일 아침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병원 천장의 불규칙한 미세 균열을 세거나, 오전 9시 방향에서 들려오는 간병인의 거친 발소리와 양동이 부딪치는 소리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세상은 그를 ‘비용’ 혹은 ‘고장 난 기계’라 불렀고, 그는 그 냉혹한 정의에 대항할 한 줌의 근육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뇌세포와 연결된 전극을 통해 흐르는 의식만은 사이트릭스의 가장 깊고 은밀한 백도어 안에서 누군가와 비릿한 밀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가상 세계에서의 그는 신에 가까웠지만, 현실의 그는 단 한 모금의 물조차 스스로 마실 수 없는 고독한 덩어리에 불과했다.
“……약속은, 정말로 지켜지는 거겠지?”
카일의 뇌파가 정교한 디지털 신호로 변환되어 어둠 속으로 전송되었다. 화면 너머, 얼굴이 짙은 노이즈로 가려진 사이트릭스의 고위 에이전트가 무기질적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마리와 그 뱃속의 태아, 그 둘의 생체 데이터와 현실 좌표를 넘겨라. 그러면 너의 의식을 우리 메인 서버의 최상위 계층, ‘플래티넘 레이어’에 영구적으로 업로드해주겠다. 더 이상 썩어가는 육체도, 타인의 연민 섞인 비릿한 손길도 없는, 영원히 늙지 않는 ‘코드의 신’이 되는 거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완벽한 진화이자, 네가 평생 갈구해온 진정한 자유다, 카일.”
카일의 마른 입술이 경련하듯 가늘게 떨렸다. 그는 고스트 대원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그에게 유일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매일 아침 병원 천장의 텍스처를 외우며 육체의 소멸을 기다려야 하는 현실의 지독한 허무를 이겨내지 못했다. 카일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정교하게 진의 퇴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수놓기를 하다가 갑자기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과 같은 정교한 배신이었다.
그가 진과 마리를 밀어 넣은 곳은 안전한 비상구가 아니었다. 그곳은 사이트릭스가 자랑하는 최정예 회수 부대, ‘리트리버’ 팀이 총구를 겨누고 대기 중인 킬 존이었다. 카일은 그 어두운 골목길 한복판으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였던 진을 천천히, 아주 우아하게 유도했다. 태블릿 화면 속에서 진의 위치를 나타내는 녹색 점이 붉은색 킬 존으로 진입하는 것을 보며, 카일은 현실의 병실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병원 천장의 그 흉측한 균열들이 보였다.
“카일, 내 말 들려? 경로가 이상해. 좌표값이 계속 튀고 있어. 내 눈앞엔 막다른 벽뿐인데, 퇴로가 확인되지 않아.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응답해, 카일!”
진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벤 리의 태블릿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평소의 호기로운 자신감과는 거리가 먼, 눅눅한 물기를 머금은 음성이었다. 거친 숨소리 너머로 마리의 가느다란 신음과 구식 엔트리스 기어가 내는 불규칙한 전자음이 섞여 들었다. 벤 리의 눈썹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모니터 속 녹색 점은 이미 막다른 골목, 도시의 내장이 쏟아져 나온 것 같은 데이터 폐기물 처리장 초입에 멈춰 서 있었다. 그곳은 한 번 발을 들이면 나갈 곳이 없는, 완벽하게 설계된 막다른 방이었다.
벤 리가 입을 열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카일의 메마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마치 수십 년 동안 습기 찬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레코드판이 긁히는 듯한,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유령의 소리였다.
“……진, 미안해.”
그 짧은 사과가 차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뜨렸다. 벤 리의 손이 가늘게 떨리며 태블릿의 모서리를 부서질 듯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카일?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카일! 당장 경로 수정해! 이 좌표는 킬 존이잖아!”
벤 리가 포효하듯 소리쳤지만, 통신망 저편에서는 더 이상 카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기계적 침묵만이 진공 상태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었다. 그들이 공유했던 유일한 안식처인 ‘신뢰’라는 텍스처가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영원히 찢겨나가는 소리였다. 벤 리는 뒤통수를 둔기로 세게 얻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병실 천장의 균열을 외우며 고독을 씹던 그 소년이, 자신들의 심장에 가장 날카로운 바늘을 꽂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현실의 온도는 너무나 낮았다.
진은 마리를 무너진 콘크리트 벽 뒤, 낡은 타이어들이 쌓인 안전한 구석에 천천히 눕혔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골목 사방에서 느껴지는 정교한 살기. 그는 가슴께를 조여오는 무거운 체념을 깊게 들이마시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는 검은 탄소 섬유 수트를 입은 리트리버 대원 열 명이 조용히, 마치 그림자가 번져 나가듯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어이, 카일. 넌 역시 똑똑해. 내가 멍청하게 널 믿은 건지도 모르겠네. 하기야, 썩어가는 몸뚱이보다는 영원한 코드가 매력적이겠지.”
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삼단봉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리트리버들의 무음 탄환이 진의 어깨와 허벅지를 꿰뚫을 때마다 붉은 선혈이 차가운 아스팔트를 검게 적셨다. 하지만 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요원의 목을 낚아채고, 자신의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마리에게 향하는 모든 길목을 거대한 육신으로 막아섰다. 그의 삼단봉이 요원의 바이저를 타격해 파편이 튀었고, 골목은 비명과 금속음으로 얼룩졌다.
진의 호흡이 짧아졌다. 폐부 깊숙이 피 냄새가 차올랐다. 그는 마지막까지 달려들던 요원의 허리를 껴안으며, 자신의 코트 안쪽에 숨겨두었던 구식 고성능 폭탄의 안전핀을 손가락에 걸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평온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벤 리의 채널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영감님…… 미안하지만, 내 시간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 저 녀석들과 함께……”
콰아앙—!
거대한 굉음이 고막을 짓이겼다.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 존재가 세상에서 영원히 로그아웃하며 내지르는 비명이자, 견고했던 신뢰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붕괴음이었다. 좁은 골목 전체가 굶주린 괴물처럼 솟구친 거대한 화염의 혀에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사라가 운전하는 승용차는 불과 몇 블록 거리까지 접근해 있었다. 앞유리 너머로 밤하늘을 찢고 솟구치는 오렌지빛 화염을 목격한 순간, 조수석의 벤 리는 숨을 멈췄다. 그는 핸들을 잡은 사라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고, 뒷좌석에서 세호가 낸 짧은 신음소리를 들었다. 벤 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화염보다 더 뜨거운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평생 수많은 이별을 겪어온 그였지만, 진의 마지막 자폭이 남긴 그 섬광은 유독 그의 심장을 시리게 찔렀다.
승용차는 타이어 비명을 지르며 잿더미와 자욱한 연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스팔트 위에 새겨진 검은 스키드 마크는 마치 찢겨진 마음의 흉터 같았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약 냄새와 타버린 고무 타는 냄새 사이로 벤 리, 사라, 그리고 세호가 차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상황은 여전히 종료되지 않았다. 화염의 열기 속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던 리트리버 잔당 세 명이 비틀거리며 총구를 치켜들었다. 놈들은 인간이라기보다 고장 난 기계처럼 기괴한 움직임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세호가 절규하며 화염 너머, 마리가 숨어 있을 구석을 향해 맹렬히 달렸다. 탄환이 그의 발치에 박히며 불꽃을 튀겼다. 사라의 권총이 차가운 정밀 기계처럼 불을 뿜으며 엄호 사격을 가했다. 탕, 탕. 건조한 총성이 골목의 벽을 타고 반사되었다.
그때, 은폐물 뒤에 숨어 있던 요원 하나가 벤 리의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와 총신을 휘둘렀다. 벤 리는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막았지만, 날카로운 금속 파편과 총탄이 그의 전완을 깊숙이 찢고 지나갔다.
“윽!”
벤 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셔츠가 순식간에 검붉은 선혈로 젖어 들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부상당한 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그의 이성을 차갑게 얼렸다. 벤 리의 눈은 이제 슬픔을 넘어,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듯한 극한의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요원의 목덜미를 부서진 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낚아챘다. 으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요원의 턱을 부수고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것은 리더의 공격이라기보다 상처 입은 짐승의 처절한 반격이었다. 이름 없는 분노 그 자체였다. 벤 리는 턱이 부서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요원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낚아채듯 뽑아냈다. 그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불필요한 곡선도 없었다.
“죽여!”
남은 두 명의 요원이 절규에 가까운 명령과 함께 동시에 달려들었다. 왼쪽 요원이 휘두른 진압봉이 벤 리의 다친 어깨를 강타했지만, 벤 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 충격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요원의 목 안쪽으로 단검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그의 얼굴을 적셨다. 요원은 눈을 부릅뜬 채 무너져 내렸고, 벤 리는 쓰러지는 요원의 어깨를 딛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지막 남은 요원이 당황해 총구를 치켜들었을 때, 벤 리는 이미 그의 머리 위를 덮치고 있었다. 벤 리의 피 묻은 오른손이 요원의 안면을 통째로 움켜쥐었다. 그대로 벽면을 향해 처박았다.
콰직!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가며 요원의 바이저가 박살 났다. 벤 리는 반사적으로 허둥대는 요원의 손목을 비틀어 꺾고, 그가 들고 있던 권총을 빼앗아 총신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요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종잇장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골목 안에는 이제 타오르는 화염의 일렁임과 벤 리의 거친 숨소리만이 남았다. 세 명의 최정예 요원들이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벤 리는 피가 흐르는 팔을 대충 옷소매로 휘감아 조이며, 연기 속에서 마리를 데리고 나오는 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은 안광을 내뿜고 있었으나, 그 너머에는 감당하기 힘든 허무가 짙게 깔려 있었다.
“전부… 끝났다.”
벤 리가 뱉어낸 말은 빗물에 젖은 재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승리했지만, 아무도 승리했다고 느끼지 못했다. 발치에 뒹구는 리트리버들의 사체는 사이트릭스가 보낼 거대한 파도의 서막일 뿐이었고, 진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되어 그들의 발밑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었다.
“서둘러요!”
사라의 외침이 현실의 감각을 일깨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벤 리는 마지막으로 진의 잔해가 흩어진 화염을 한 번 더 돌아본 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차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뒤로 긴 혈흔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도시는 여전히 고요했고, 그 고요함은 곧 들이닥칠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둘러요! 지금 경찰과 사이트릭스 팀이 이 구역 진입로를 봉쇄하고 있어요!”
사라가 차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5분 뒤면 관제 센터에서 이 지역 모든 도로를 물리적으로 차단할 거예요. 인근 경찰차들이 경광등을 켜고 이쪽으로 집결 중이에요. 지금 못 나가면 우린 쥐구멍 없는 상자 안에 갇히는 꼴이 된다고요!”
벤 리는 잠시 멈춰 서서 불타버린 진의 흔적을 응시했다. 이제는 검은 재와 파편이 되어버린, 한때 누구보다 뜨거웠던 동료의 자리를 아주 짧게, 하지만 영원처럼 길게 눈에 담았다. 그는 부상당한 팔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한 채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슬픔을 안으로 삼키는 유일한 방법은 복수를 위해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가야 해. 진이 목숨과 맞바꿔 만들어준 이 찰나의 시간을 1초라도 낭비할 순 없어.”
일행은 비명을 지르는 엔진 소리와 함께 사라의 차에 몸을 던졌다. 은색 승용차는 경찰의 차단선이 완전히 형성되기 직전, 좁은 골목 사이를 간발의 차로 통과하며 타이어 타는 냄새와 지독한 슬픔을 뒤로한 채 현장을 빠져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오렌지빛 화염 속에는, 한 남자의 숭고한 희생과 소년의 비겁한 배신, 그리고 무너져버린 안식처의 파편들이 뒤섞인 채 차가운 밤비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고 오만한 네온사인으로 빛났고, 그들의 길고 지독한 하루는 이제 막 가장 어두운 밤의 심장부를 향해 비린내 나는 질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길을 잃은 고양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려오는 듯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사실은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은, 지독하게 아름답고도 잔인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