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의 비명

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11화

by아이작 유

침묵은 결코 평화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시스템이 오류를 처리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지극히 기계적인 막간에 불과했다. 벤 리의 목소리가 아카이브의 회색 먼지 속으로 잦아들었을 때, 세호는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우리가 아는 초침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공간은 정지해 있는 듯했으나, 그 이면에서는 수조 개의 코드가 쉼 없이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가장 먼저 균열을 일으킨 것은 사라의 모니터들이었다. 평소 정물화처럼 고요하던 수천 개의 화면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마치 수조 마리의 매미가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 같은, 고막이 아니라 신경의 끝단을 긁어대는 금속성 소음이었다.


"안 돼……."


사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0과 1의 폭포가 핏빛으로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은 갈 곳을 잃고 가늘게 떨렸다. 평소 감정이 거세된 기계처럼 굴던 그녀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데이터가 아니에요. 이건 냄새예요. 너무나 생생하고 비논리적인, 살아 있는 것들의 냄새. 시스템이 계산할 수 없는 농밀한 악의가 이 공간의 벽을 핥고 있어요.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어요."


사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카이브의 하늘—혹은 하늘이라고 명명된 회색 데이터의 적층—이 비명을 지르며 쩍 갈라졌다. 그 틈새로 쏟아져 내린 것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검은 액체들이었다. 사이트릭스의 사냥개, '스니프'였다. 그것들은 바닥에 닿는 순간 기괴하게 관절을 꺾으며 사냥개의 형상으로 변했고, 착지한 지점의 데이터를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바닥에 고여 있던 낡은 기억들, 이름 모를 사용자들이 남긴 흔적들이 놈들의 아가리 속에서 무참히 삭제되었다.


"당황하지 마라. 아카이브는 우리 영토다!"


벤 리가 등 뒤에 메고 있던 낡은 가죽 가방을 열어 바닥에 내던졌다. 가방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구식 진공관과 녹슨 전선들이 엉킨 기괴한 장치들이었다.


"사라, 좌표 찍어!"


벤 리의 명령에 사라가 허공을 낚아챘다. 그녀의 눈앞에 아카이브 전체가 3차원 격자무늬로 재구성되었다. 사라는 자폐 스펙트럼 특유의 고도화된 집중력으로, 쏟아지는 수백 마리 스니프들의 이동 궤적을 실시간으로 계산해냈다.


"섹터 4에서 9, 진입 각도 45도. 3초 뒤에 수렴해요!"


사라의 외침과 동시에 벤 리가 바닥의 장치를 발로 찼다.

지직—! 콰아앙!

장치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전자기 펄스(EMP) 노이즈'가 스니프들의 흐릿한 형상을 타격했다. 사이트릭스의 정교한 코드들이 벤 리가 뿌려놓은 구식 아날로그 노이즈와 충돌하며 비명을 질렀다. 놈들의 움직임이 렉(Lag)이 걸린 듯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벤 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허리춤에서 낡은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카일, 탄환 동기화시켜!"

"알았다고, 영감님!"


카일이 공중에서 손가락을 튕기자, 벤 리의 총구에서 나가는 탄환마다 '강제 로그아웃' 코드가 덧씌워졌다.

탕! 탕! 탕!


벤 리가 쏜 탄환이 스니프들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탄환에 맞은 스니프들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허공으로 증발했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잘못 기입된 오타를 지우개로 박박 지워내는 비정한 사무 행위에 가까웠다. 리더다운 냉철하고 정교한 사격이었다.


하지만 파국은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겼을 뿐이었다. 스니프들 뒤로, 아카이브의 찢어진 틈새에서 '에이전트'들이 강림했다. 검은 수트와 흐트러짐 없는 넥타이, 그리고 감정이라곤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무기질적인 눈동자. 그들은 벤 리가 뿌려놓은 노이즈 장벽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우아하고 기괴한 보폭으로 공중을 밟으며 내려왔다.


"진, 지금이야!"


벤 리의 신호에 맞춰,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진이 폭풍처럼 튀어 나갔다.


"이 자식들, 내 구역에서 당장 꺼져!"


진의 주먹이 에이전트의 안면을 강타했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고개만 살짝 돌아갔을 뿐, 곧바로 무표정한 눈으로 진을 응시했다. 에이전트의 차가운 손가락이 진의 목을 향해 뱀처럼 뻗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모니터 너머에서 데이터의 파동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사라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진, 뒤야! 그림자가 겹쳐요!"


그것은 좌표가 아니라 본능적인 경고였다. 진은 사라의 날카로운 음성에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0.1초 뒤, 진이 서 있던 공간을 진 뒤에 숨어 있던 에이전트의 손날이 단검처럼 가르고 지나갔다. 에이전트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며 데이터 장막을 찢어발겼고, 그 틈을 타 진은 바닥을 구르며 에이전트의 오금을 걷어찼다.


"고맙다, 꼬맹이!"


진이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주먹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에이전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계적인 협동으로 진과 벤 리를 서서히 포위망에 가두기 시작했다.


"카일, 방벽 수치 떨어지고 있어! 뭐 하는 거야!"


벤 리가 리볼버를 발사하며 외쳤다. 카일의 휠체어 아바타 주변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 자식들이 내 연산 루트를 직접 공격하고 있다고! 영감님, 나도 지금 뇌가 타버릴 것 같단 말이야!"


카일의 비명과 함께 아카이브를 지탱하던 거대한 데이터 기둥 하나가 하얗게 점멸하며 소멸했다. 공간이 심하게 흔들리며 마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에이전트 세 명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쓰러진 마리와 세호를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안 돼...!"


사라가 제어판을 미친 듯이 두드렸지만, 이미 에이전트들의 '관리자 권한'이 그녀의 간섭을 차단하고 있었다. 벤 리는 멀리서 스니프 부대에게 발이 묶여 있었고, 진은 두 명의 에이전트와 사투를 벌이느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절망적인 침묵이 세호의 귓가를 메웠다. 마리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와, 자신들을 지우기 위해 다가오는 에이전트들의 무표정한 안면. 그 순간, 벤 리가 지옥의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세호와 마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리볼버가 아닌, 복잡한 회로가 외벽을 감싸고 있는 은색 구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벤 리는 망설임 없이 구체의 중심부를 눌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전부 엎드려!”


지직, 하는 신경질적인 소음과 함께 구체에서 청백색의 고밀도 데이터 파동이 부채꼴 모양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사이트릭스의 논리 체계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강제 정지 필드(Stasis Field)'였다. 쇄도하던 에이전트들의 신체가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들의 무표정한 안면 위로 에러 메시지가 잘게 부서지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벤 리는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통신망을 향해 포효했다.


“카일! 지금이다! 쏟아부어!”

“아카이브 오버클럭! 뇌가 녹아도 난 모른다!”


카일의 비명과 함께 그의 아바타 주변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아카이브의 천장을 지탱하던 거대한 서버 랙들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상 물체가 아니었다. 카일은 아카이브에 쌓인 테라바이트급 쓰레기 데이터들을 강제로 물리적 질량으로 변환하고 있었다.


콰아앙!


하늘에서 쏟아진 수십 톤의 데이터 덩어리들이 정지해 있던 에이전트들을 덮쳤다. 정교하게 설계된 에이전트들의 신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쇳덩이 아래 깔려 짓개겨졌다.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길이 열렸다.


그러나 사라는 안심하는 대신 절망적인 표정으로 천장 너머를 가리켰다. 찢겨진 데이터 장막 너머, 아카이브의 회색 하늘에는 수천 개의 붉은 안광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사이트릭스가 이 '치명적인 오작동'을 도려내기 위해 투입한 끝도 없는 증원군이었다. 놈들은 질서 정연한 거대한 파도처럼 아카이브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여긴 끝났어. 아카이브를 포기한다.”


벤 리가 입술을 짓씹으며 주머니에서 낡은 기폭 장치를 꺼냈다. 그것은 아카이브의 메인 코어를 강제로 붕괴시키는 논리 폭탄이었다. 유령들의 성지, 그들이 십수 년간 쌓아올린 유일한 안식처를 스스로 지워버려야 하는 비정한 순간이었다.


“카일, 백도어 열어! 진, 사라를 데리고 먼저 움직여! 세호, 마리 씨를 데리고 달려! 뒤를 돌아보지 마라!”


사라가 허공을 낚아채자 파란색 빛의 선이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그것은 마치 지옥 속에 던져진 유일한 구명줄 같았다. 세호는 정신없이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세호의 심장까지 전달되어 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들은 사라가 만든 빛의 선을 따라 폐기물 처리로의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벤 리가 최후의 순간, 기폭 장치의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콰아앙—!


그것은 소리가 없는 폭발이었다. 아카이브라는 공간 자체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며 모든 존재를 무(無)로 돌리는 거대한 논리의 소용돌이였다. 뒤따라오던 수천의 스니프와 에이전트들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명도 없이 소멸하는 광경이 세호의 망막에 낙인처럼 찍혔다. 아카이브를 구성하던 수억 개의 조각들이 한 점의 빛으로 수렴하며 사라지는 순간, 세호는 마치 자신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뛰어!”


벤 리의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암흑 속에서 세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리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의 살결에 닿은 것은 차갑고 습한 공기였다. 아카이브의 건조한 회색 노이즈 대신, 기계의 낮은 웅웅거림만이 들리는 어두운 터널 안이었다. 축축한 바닥에서는 정체 모를 액체가 흘렀고, 벽면에는 곰팡이처럼 증식한 낡은 코드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벤 리가 낡은 재킷을 털며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아카이브를 잃은 슬픔보다, 앞으로 마주할 지옥에 대한 결연함이 더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터널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멀리서 명멸하는 사이트릭스의 차가운 네온사인이 유혹하듯 빛나고 있었다.


“아카이브는 지워졌네. 이제 사이트릭스는 자네들이 죽었다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자존심을 걸고 더 지독한 사냥꾼들을 풀겠지.”


벤 리가 세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비장함과 아주 작은 희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준비하게. 내일부터는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훨씬 더 길고 지독한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이제 우리는 숨는 법을 잊어야 하네. 적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법만 기억하게.”


세호는 마리의 손을 꽉 쥐었다. 마리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은 숨을 곳이 없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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