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고립의 시간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이 물건을 모아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한 집요한 기록이라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반대로 시간이 한 사람의 자리를 어떻게 무자비하게 지워나가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파묵의 주인공 케말이 물건의 촉감과 냄새를 통해 지나간 사랑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왔다면, 카프카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스스로 방 한구석의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어가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체도 없이 소멸해 간다.
어느 날 아침, 아무런 예고도 없이 거대한 벌레로 깨어난 그레고르의 모습은 단순한 신체의 변이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일해서 돈을 벌 수 없다는 뜻이며, 인간으로서 쌓아 온 삶의 모든 과정이 일시에 멈췄다는 뜻이다. 카프카는 몸이 바뀐 비현실적인 사건 자체보다, 한 사람의 삶이 깨져나가는 지독한 시간에 집중한다. 그레고르의 삶은 이 아침을 기점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관계에서 조금씩 지워지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첫 문장은 한 인간의 슬롯적 수명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려준다. 그레고르에게 시간은 이제 돈이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용한 껍데기다. 그는 더 이상 새벽 기차를 타고 출근해 가혹한 상사의 눈치를 볼 수도 없고, 집안에 지워진 거대한 빚을 갚을 수도 없으며, 사랑하는 여동생의 학비를 댈 수도 없다. 밥벌이라는 슬롯적 쓰임을 잃어버린 순간, 슬롯가 그에게 주었던 시간의 시곗바늘은 멈춘다. 일을 하지 못하는 존재에게 달력이나 시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 앞에는 흐르지 않고 어둡게 고여 있는 무의미한 시간만 남는다. 그는 슬롯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서 튕겨 나온 폐기된 부품이다. 처음 며칠 동안은 가족을 걱정하며 자신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지만, 세상의 시간은 그의 간절한 바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레고르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속도보다, 가족들이 그의 부재에 적응하고 그라는 존재를 지워내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가족들은 더 이상 그레고르를 아들이나 오빠, 혹은 집안의 기둥이었던 가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의 방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이해하려던 가족들의 초조한 시도 역시 며칠 지나지 않아 냉담하게 멈춘다. 그가 정작 잃어버린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집과 슬롯라는 공간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시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관계들을 하나씩 잘라내며, 가족들이 그레고르 없는 일상을 서서히 되찾아갈수록 그레고르는 철저히 혼자 남겨진다. 어머니는 처음엔 아들의 방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들의 존재보다 당장의 집안일과 생계를 걱정하고, 아버지는 두려움을 넘어 그를 치워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긴다.
'내가 만약 부모님 때문에 참지만 않았어도 벌써 사직서를 냈을 텐데.'
이 혼잣말처럼, 그레고르는 그동안 오직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삶을 소모했다. 그러나 그가 벌레가 되는 순간, 그가 바쳤던 그 지독한 헌신의 시간들은 아무런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레고르의 방은 집 안 한구석에 고립된 외로운 섬이 된다. 그곳에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기록이 쌓이는 대신 어두운 먼지만 겹겹이 쌓여간다. 낮과 밤의 구분도 희미해지고, 그를 인간의 세계와 연결해 주던 시계와 달력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예전에는 부드럽던 침대보가 다리의 털에 거슬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보다 어두운 가구 밑이 더 편안해지는 과정은, 그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방 안의 가구나 소품처럼 변해간다는 서글픈 증거다.
카프카는 사람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것이 결국 타인의 시선과 기억, 그리고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온라인 게임 동료들의 얼굴이나 가족과의 따뜻했던 기억이 희미해질 때, 한 인간의 존재감 역시 희미해진다. 여기서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에 남긴 흔적과 존엄성을 조금씩 갉아먹는 부식제일 뿐이다.
사람과 물건의 경계는 방 안으로 밀려드는 집안의 잡동사니들을 통해 더 분명해진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방을 쓰지 않는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기 시작한다. 버려진 낡은 가구와 먼지 쌓인 상자들 사이에 묻힌 그레고르는 방 한구석을 차지한 거추장스러운 집기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누군가에게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받는 그 비참한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사물로 몰락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바로 뒤이어 그의 등에 온 힘으로 얻어맞은 어떤 것이었다. ... 바로 그 사과 하나가 그레고르의 등에 단단히 박혔다.'
가족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 폭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버지가 던진 매정한 사과가 등에 박혀 썩어가는 모습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어떻게 망가지고 부패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물증이다. 등에 박힌 사과는 그레고르가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가족이 아니라, 하루빨리 치워버려야 할 가치 없는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등에 박힌 사과는 깊이 썩어가고, 그레고르의 숨도 그 속도에 맞춰 점점 가빠지고 희미해진다.
반면 가족들의 시간은 그레고르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가벼워지고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레고르가 스스로의 존재를 잃어가는 만큼, 가족들은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는다. 사람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거나 몸이 소멸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과 마음에서 자리가 지워질 때 비로소 완전히 끝난다. 그레고르는 점점 더 과거에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과거의 자신에게서 아득히 멀어진다.
그는 처음에 인간이었을 때의 습관과 흔적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벽에 걸린 모피를 두른 여인의 사진을 몸으로 가리며 지키려 했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가족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잔인한 시간은 점차 그의 인간적 감각마저 마비시킨다. 부드럽고 신선한 음식 대신 썩은 채소와 신선하지 않은 음식을 찾게 되고, 넓은 방 안을 거니는 것보다 어둡고 좁은 쇼파 밑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을 인간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던 삶의 규칙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오빠나 아들이 아니라, 집안 한쪽에 치워두어야 할 불편한 물건에 불과하다. 여동생 그레테마저 그를 더 이상 인간으로 부르지 않고 '저것'이라 칭하며 치워야 한다고 말할 때, 그레고르라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진다. 한때 가족의 평온을 위해 자신의 청춘과 시간을 바쳤던 그 모든 노동은 어떤 고마움이나 보답으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의 잔혹한 시간은 지나간 희생과 헌신을 기억해주지 않으며, 오직 쓸모 없어진 지금의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는 가족들의 희망찬 미래를 가로막는 무거운 짐이자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가족들은 그가 사라져 주기를 바라며 그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시간표 안에서 그레고르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마지막까지 탑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온통 툭 떨어졌고, 그의 코에서 마지막 숨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레고르의 마지막은 서글플 정도로 고요하다. 그는 스스로 가족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완전히 거부하며 자신의 몸무게와 존재감을 줄여나간다. 그리고 어느 조용한 새벽, 그는 아무런 절규나 원망도 없이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쉬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숨을 거둔 뒤, 집안을 감싸고 있던 무거운 침묵과 절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가족들의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진다. 집안의 공기는 다시 쾌적해지고 희망찬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그들은 마침내 그레고르라는 정지된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가족들이 나들이를 가며 앞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은 시간의 비정하고 잔인한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흘러간다. 부모는 어느새 훌쩍 자란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것은 그레고르라는 아프고 불편한 시간을 완전히 제거하고 얻어낸 결과다. 몸이 소멸할 때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에서 가 사라질 때 비로소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끝난다.
카프카는 묻는다. "당신은 언제 사라지는가?"
사라짐은 외형이 바뀔 때가 아니라, 기억과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에 찾아온다. 잊힌다는 것은 한 사람이 쏟은 시간과 노력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일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말은 틀렸다. 카프카가 보여준 시간은 해결이나 치유가 아니라 삭제다. 타인의 필요에 따라 내 위치가 정해지고, 쓰임이 다하면 언제든 물건처럼 취급받을 수 있다는 경고다. 그레고르의 방에 쌓이던 먼지는 언젠가 우리 자리에 쌓일 망각의 흔적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맺은 관계들, 매일 쏟아붓는 노동의 시간들. 이것들이 나를 증명한다고 믿지만, 만약 내일 아침 나의 쓸모가 사라진다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갈까. 카프카의 벌레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 슬롯적 쓰임이라는 아슬아슬한 줄 위에 버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레고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창밖의 새벽빛은 말이 없었다. 세상은 누군가가 사라져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갈 길을 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뿐이다. 물건 속에 시간을 가두려 했던 케말의 집착이 이해되는 이유도, 카프카가 보여준 이 잔인한 소멸을 이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