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존재의 밀도와 무게의 시간

by세인트

인간은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연습할 수 없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린 결정은 그 즉시 현실이 되어 몸에 남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관념적인 사랑이나 정치적 이념을 설명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바카라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한 인간의 손에 들리는 도구가 어떻게 바뀌고, 그에 따라 그 사람의 시간과 삶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기록이다.


바카라의 처음에 쿤데라는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는 체코 속담('Einmal ist keinmal')을 끌어온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 처음 하는 일은 늘 비교할 기준이 없어 가벼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것, 인류 역사란 단 한 번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끝날 것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시간의 속성 때문에, 처음에 가볍게 내린 선택들이 쌓여 한 사람의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이 된다. 순간의 가벼운 선택이 쌓여 시간이 지나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무게로 몸을 누른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를 깨닫는 순간, 가볍게 여겼던 행동들은 무거운 삶의 무게가 되어 인간을 짓누른다.


'가장 무거운 짐은 우리를 짓눌러 바닥으로 밀착시킨다. 그러나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은 지상에 가까워지고, 더 밀착되고, 더욱 진실해진다.'


주인공 토마시의 시간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가치관이나 사상이 아니라 그의 손이 거쳐 가는 물리적인 도구들이다. 젊은 시절 외과의사인 그의 손에는 늘 차갑고 정밀한 수술용 메스와 청진기가 들려 있었다. 당시 토마시는 여자들을 짧게 만나고 헤어지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가벼운 시간을 살았다고 믿었다. 그에게 시간은 잘라 쓸 수 있는 마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시골 온천장에서 만난 테레사가 그를 찾아와 그의 침대에 눕는 순간, 그가 쓰던 공간과 시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흔들린다.


'그녀는 바구니에 담겨 그에게 보내진 아이였다. 그는 그녀를 자기 삶의 바다라는 강물에 흘려보내야만 했다.'


이전까지 토마시에게 여자란 관계를 맺고 곧바로 옷을 입혀 보내는 가벼운 시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테레사는 그의 집에 누워 아침을 맞이한다. 테레사의 몸과 짐이 그의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토마시는 아침마다 그녀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고, 밤마다 그녀가 꿈속에서 신음할 때마다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시간을 살게 된다.


시간이 흘러 토마시가 공산당을 비판하는 글을 철회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소설은 그를 거창한 정치적 투사로 그리 지 않는다. 당국이 그에게서 수술 도구와 청진기를 빼앗자, 그의 삶은 즉시 변한다. 토마시는 생계를 위해 창문 닦이 대걸레와 양동이를 손에 쥔다.


손에 쥔 도구가 청진기에서 대걸레로 바뀜에 따라, 그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차갑고 정돈된 병원 수술실에서 프라하 시내의 먼지 쌓인 유리창 앞, 그리고 시골 마을의 기름냄새 나는 트럭 운전석으로 옮겨간다. 그가 다루는 대상은 날카로운 메스 아래의 신체가 아니라, 유리창에 들러붙은 먼지와 트럭의 무거운 핸들이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관념이나 이념을 품느냐가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매일 어떤 도구를 손에 쥐고 몸을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테레사 역시 시간과 육체의 고통을 신체적으로 견디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딸에게 옷을 벗은 채 온 집안을 돌아다니게 했고, 테레사가 수치심에 몸을 가리려 하면 "너도 어차피 나와 똑같은 육체일 뿐인데 잘난 척 가리지 마라"며 면박을 주었다. 어머니에 의해 수치심과 인격의 자존감을 강제로 빼앗긴 이 신체적 기억 때문에, 테레사는 자기 몸을 쉽게 짓밟힐 수 있는 고기 덩어리로 여기며 살았다.


1968년 소련군 탱크가 프라하를 짓밟으며 들어왔을 때, 테레사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대신 카메라를 손에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녀는 렌즈를 통해 탱크와 군인들을 노려보며 셔터를 누른다. 지나가는 시간의 한순간을 필름이라는 물질에 담아내는 이 행동은, 점령당한 도시의 길거리 위에 테레사라는 사람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 된다.


반면 화가 사비나는 시간과 장소에 매이기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시간은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존의 관계를 잘라내고 거처를 이동시키는 단절의 연속이다. 사비나는 부모의 집을 떠나고, 프라하의 화실을 뒤로하고,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자신의 몸을 이동시킨다. 그녀가 이사할 때마다 손에 들고 옮기는 것은 화구 가방과 검은색 검투사 모자뿐이다.


'배신이란 대열에서 이탈해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대열을 이탈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과 인간관계라는 무게를 털어내고 한없이 가벼워진 사비나의 손에 남는 것은 통쾌한 자유가 아니라 텅 빈 공허뿐이다. 지탱해 줄 바닥도, 돌아갈 장소도 없는 허공의 시간 속에서 사비나는 깨닫는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가벼움이란 결국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신체적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해간다는 슬픈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육체의 쇠퇴와 배설, 죽음이라는 진짜 고통을 매끄러운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이 바로 '키치(Kitsch)'다. 키치는 노화, 질병, 피와 똥처럼 인간의 육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불쾌하고 더러운 사실들을 눈앞에서 감추어버린다. 그리고 오직 감동적인 눈물과 아름다운 말, 거창한 구호만으로 삶을 채울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인다.


'키치란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가 똥을 부정하는 세계관이다.'


이 거짓 위안과 화려한 관념에 속아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육체적 시간을 잃어버린다. 정치적 선동가들이나 헛된 신념에 사로잡힌 이들은 대중의 눈앞에서 똥과 피를 치워버린 채 깃발을 흔들라고 요구한다. 토마시와 테레사가 프라하의 소란스러운 도심을 뒤로하고 시골 마을로 내려간 것은 정치적 투쟁에서 패배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키치의 거짓 구호에서 벗어나, 자신들에게 남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러,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소멸은 암에 걸린 개 카레닌를 통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한때 마당을 뛰어다니며 테레사에게 매일 아침 빵을 가져다주던 카레닌의 다리에 큼지막한 혹이 생기고, 결국 서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 거친 숨만 쉰다. 토마시와 테레사는 거창한 말이나 관념으로 카레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피와 고름이 묻어 나오는 카레닌의 다리를 닦아주고, 약을 주사한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유토피아적이다. 그 사랑에는 갈등도 없고, 가슴을 찢는 장면도 없다.'


수술 도구를 쥐던 정교한 의사에서 프라하의 유리창을 닦고, 시골 마을의 기름때 묻은 트럭 핸들을 잡게 된 토마시는 마지막 순간 시골 여관의 작은 방에서 테레사에게 자신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슬롯적 신분이나 직업적 성공이라는 헛된 목표를 손에서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바라보는 현재의 시간만이 온전히 두 사람의 진짜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사람이 트럭 사고로 죽어가는 비극적인 순간을 굳이 묘사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시간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육체의 소멸일 뿐이다. 쿤데라가 소설의 맨 마지막에 놓아둔 장면은, 죽기 바로 전날 밤 둔탁한 풍금 소리가 흐르는 시골 여관의 조용한 방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발을 맞추어 춤을 추는 신체적 행동이다.


'여관 방에서 둔탁한 풍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테레사는 토마시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인생은 거창한 이념이나 관념의 구호로 살아지지 않는다.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매일 손으로 물리적인 도구를 다루고, 늙어가는 몸의 고통을 견디며, 눈앞에 있는 사람의 체온을 손으로 느끼다가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결국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남기는 것은, 그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살아낸 구체적인 행동의 흔적들이다.

이전 05화슈테판 츠바이크 - 어제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