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후
길을 잃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

by노푸름



길찾기는 현위치 찾기부터


으레 관광객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아침 일찍 일어나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우리의 목적지는 ‘가와라마치 산조’역. 귀를 쫑긋하고 내릴 곳을 몇 번이나 확인한다.


‘한국이면 한 번에 내릴 텐데’하며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본심은 ‘아쉬움’이구나 라는 걸 저절로 꺠닫는다. 하필 출근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내가 내리는 곳에 잘 내릴 수 있을지 초조해져갔다.

“이제 다음이다. 맞지?”

“응. 맞아.”


그렇게 크로스체크를 하고 우리는 주춤주춤 내릴 준비를 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여기서 내리는 듯하다. 마지막 카드를 찍고 내리는 관문도 잘 통과해야 할텐데.

image.png

이코카 카드를 들고 신중을 기하여 탭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던 게 사라지면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리가또고자이마스~”


한 칸, 두 칸 계단을 내려가자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속 에블린처럼 멀티버스를 이용해 다른차원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가 내게 이어폰을 끼어준 것도 아닌데.


가와라마치에는 백화점, 음식점부터 니치한 브랜드부터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다양한 상점가가 몰려있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붐빈다. 관광객에게는 대공황이지만, 일단은 바삐 걸어가는 행인들의 길을 막으면 안 되니, 버스정류장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잽싸게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목적지 방향을 찾는다.

image.png

길을 잃었었다. 해고를 당하고 앞으로 이 나이에 무엇을 해 먹고 살아야 하나, 이 지긋지긋한 고민은 아직도 따라다니는구나 싶어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탄탄한 경력이나, 이렇다할 성과를 냈더라면 이직이라도 쉽지. 고작 1년 만에 해고를 당했으니, 앞길이 캄캄했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지금처럼 내 현위치를 제일 먼저 파악하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어디에 와 있나. 그 후에 목적지를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분명 출판사 경력이 있지만, 내세울만 한 이력도 아니었다. 그러면 다른 직종을 찾을 것인가. 그렇게 하나씩 질문을 하다보니 내 위치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글을 쓰고 싶구나’

‘그 글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구나’ 라는 걸.


낮았던 소음의 음조가 높아지고, 넓은 햇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수히 많은 인파들의 에너지가 수렴하는 컨디션 난조의 여행객을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해고 당했을 때 팁 : 부당해고로 의심이 된다고 해서 ‘당신네들 신고할 거야’라고 절대 먼저 겁을 줘선 안 된다. 우선 5인 미만 사업장인지 철저하게 확인하고 질러야(?) 한다. ‘우리 회사는 일하는 사람은 같은데, 소속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어요.’ 라며 부당해고로 신고할 수 없는 사업장이라고 걱정한다. 고용노동부에서는 같은 업무를 두 사업장의 직원들이 함께 일을 하고, 업무 관련 서류를 공유하고 있다면, 실질적으로 5인 이상 사업장으로 볼 수 있는 판례가 있다. 해고된 것도 서러운데, 부당한 것에 지지 말자!



프로페셔널한 접객 서비스 스마또 코히(Smart Coffee)


image.png

아침일찍부터 붐비는 버스를 타고 온 이유는 순전히 ‘스마트 커피’ 때문이다. 교토는 커피와 빵 소비량이 일본 내에서 1등일 정도로, 그 사랑과 역사가 각별한 곳이다. 그런 만큼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커피 가게가 즐비한 교토 내에서 3대 커피로 꼽힌 ‘스마트 커피’를 찾았다.

image.png

1932년(쇼와 7년) 데라마치 산조에 문을 연 스마트 커피점(スマート珈琲店)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커피를 판다는 슬로건 아래 교토 특유의 강배전(센 불에서 원두를 로스팅해 고소한 향과 진한 커피 맛이 특징)의 매력은 살리되, 스마트 커피만의 차별성을 위해 자가배전 방식을 사용한 커피는 100년이 다 되도록 사랑을 받는 로컬 카페다.

image.png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픈런을 하고 느긋하게 조식을 즐기고 있는 걸 보니 얼른 들어가서 나도 저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현지인 50%, 관광객 50% 정도. 20분 정도 기다리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웨이트리스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점원은 우리를 능숙하고 우아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입을 법한 발끝을 덮는 긴 기장의 앞치마가 세련되고 고풍스러운 카페의 분위기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메뉴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두 잔과 프렌치 토스트 1개.


고요하지만 은은하게 들리는 재즈풍의 노래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빙을 하는 점원들은 정말로 이 곳에 온 나를 존중해 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때쯤 우리가 주문한 커피와 토스트가 나왔다.


조그만 찻잔에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검은색에 가까운 교토식 커피. 첫인상은 강렬했다.

‘이거 먹어도 괜찮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역시나 쓰다.

image.png

그런데 이 진한 향긋함과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 그윽함이 정말 좋다.

한 모금 더 마신다.

묵직하게 내 혀뿌리를 치고 들어오는 교토식 커피는 ‘이 정도는 볶아야 커피 맛이 나지!’라고 강권하는 맛이랄까. 나에게는 너무 강렬해서 함께 준 유크림을 넣어 쓴 맛을 중화시킨다.


하이라이트인 프렌치 토스트를 시식해 본다.

image.png

두툼하고 네모난 프렌치 토스트. 겉면은 노르스름하고 바삭해 보였다. 나이프로 그 속을 자르니 토스트의 결이 살아 있다. 일반적인 프렌치 토스트라 하면 촉촉함과 부드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숙성을 하거나, 식빵 속에 수분감을 가득 채워 두려 노력한다. 반면 스마트 커피의 프렌치 토스트는 퐁신하고 가벼운 식감을 살리기 위해 버터양을 줄이고 식빵의 쫄깃한 식감을 살린 스타일이다.

'

첫 맛은 입안에서 신선한 버터향과 우유의 부드러움이 가득찬다. 계란의 비린내가 날 수 있는데, 거슬리지 않으니 마음 편히 고소함을 느낀다. 기다리길 잘했다는 만족감도 차오른다.

‘순정’을 맛 보았으니, 이제 튜닝 단계로 넘어가본다.


“시럽 반만 부어줘.”


시럽 병을 조심스럽게 들어서 노란 토스트 건물에 갈색 시럽의 페인트를 부었다. 시럽은 반만 붓는다. 시럽을 전부 부으면 식빵은 빠르게 흡수해 버려서 바삭하게 무너져 내리는 토스트의 퐁신함이 사라지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순 없지.

image.png

맛도 맛이지만, 나는 여기 점원들의 프로페셔널한 접객 서비스를 리스펙하고 싶다. 메이드 카페처럼 유난스럽게 환대를 한다거나, 무릎을 꿇고 부담스럽게 접객하는 서비스를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여기는 거창하고 화려한 스타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사려깊게 살펴서 내어주는 서비스에서 품격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점원에겐 어쩌면 매일 같이 보는 커피, 매일 같이 보는 똑같은 프렌치 토스트겠지만, 우리 같은 관광객에게는 애지중지하고 기대하는 코스 중에 하나다. 그 마음을 헤아려주듯 굳이 말하지 않아도 컵의 물이 떨어지면 와서 채워주고, 커피에 넣는 밀크가 더 필요하진 않은지. 휴지가 다 떨어지지 않았는지. 유심히 보고 오차 없이 처리해 준다.


‘저희 가게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떠나면 좋겠습니다.’ 라는 태도랄까.


이런 관심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호강을 한다니. 그런 서비스를 받으니 내가 걱정해야 할 것들이 반은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사소하지만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게 이렇게 의지가 될 줄이야.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서비스까지 얻을 수 있는 경험을 하지 않는 건, 바삭한 식감이 매력인 프렌치토스트에 시럽을 몽땅 부어버리는 짓 만큼이나 미련한 선택일 것이다.

image.png

우리나라에서 어떤 커피집을 가도 드립백을 사지 않던 나였건만, 스마트 커피 문을 나가기 아쉬워 하나라도 기억하고 싶은 기념품을 가지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 커피의 드립백을 샀다. 한국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스마트 커피에서 즐긴 편안한 분위기가 생생하게 우러나겠지.



여행이 주는 최고의 사치


image.png

붉은 간판을 건 맛집 앞에 긴 줄도 마다 않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 열심히 걷는 사람들. 하나의 일을 끝내고 새로운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나도 저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여기에선 제3자의 시선으로 나를 철학해 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여행자의 신분으로 바라보니 다른 차원의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특권이 주어진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생의 근원적인 질문이 이렇게 정신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발현한다는 점에서 당혹스러웠지만, 여행을 하면 관찰자로서 내가 속한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깨닫고 나는 그 기회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 기회를 통해 모래처럼 허망한 인간의 삶을 통찰해 보기도 하고, 철학자처럼 심오한 질문이 생성된다.


‘특별한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나’는 왜 스스로가 쓸모없고 미련해 보일까.’

고루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 하지만 좁은 세상에 파묻혀 살 때는 절대로 태어나지 않을 물음표다. 먹고 사는 문제, 노후 문제, 내집 마련, 커리어, 임신, 육아 등 미션이 산적한 현실에선 그런 질문할 겨를이 없으니까.

image.png

그 시기를 후회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에게나 그 질문이 다가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그런 슬롯가 부여한 바카라임으로부터 잠시 떠나오는 경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비싼 여행지 와서 ‘이게 무슨 돈 낭비인가’ 하는 불안이 치밀어 오르고, ‘정신 차리고 여행에 집중하자’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질문은 내내 형형한 촛불처럼 내 마음 안쪽에서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질문은 내 안에서 태어나 생명력을 가지면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맞닥뜨린다. 이 질문은 어떻게 자랄 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질문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가로이 이런 질문의 답을 찾는 시간은 분명 사치스럽다. 내 앞에 누려야 할 관광지와 먹거리와 경험들이 즐비한데, 그걸 넋 놓고 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낭비인가.

KakaoTalk_20260703_133126973_02.jpg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계산을 미룰 정도로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밖에선 도저히 찾을 수 없던 내 안의 무구한 가능성을 또렷이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이런 사치는 돈이 많아야 누릴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이해한다. 차분히 들여다 보면 사실 돈이 필요하기 보단, ‘여행 가서 그것도 안했냐’는 핀잔을 감수할 의향과 남들은 절대 하지 않을 미련한 도전을 감행하는 건 돈이 많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내가 감수해야 할 손해에 비해 내가 얻는 것을 따지면 사실 그리 비싼 값을 치루는 일도 아니다.


여행자에게는 이렇게 사치스럽고, 시간 낭비 같은 질문을 마구 생각해도 되는 자유가 부여된다. 세상 모든 사치품이 그렇듯 이렇게 사치스러운 시간은 우리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설령 답을 찾지 못했다 손 치더라도 그 손해를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헤매는 내게는 그 가치가 있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치의 기준은 모두 다르겠지만, 삶과 무관해 보이는 질문을 떠올리는 시간은 무언가로부터 떠나온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가치 있는 사치다. 내게 이만한 사치가 또 있을까.


안녕하세요. 해고된 김에 교토 노푸름입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명한 관광지보다 버스정류장 하나, 커피 한 잔, 낯선 거리에서 길을 찾던 몇 분이 오래 기억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교토 여행도 제게는 그런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교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이라 불리는 닌넨자카를 걸어 청수사(기요미즈데라)로 향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실 블루보틀 교토에도 들를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더 여행다워진다'는 말을 몸소 실감하게 만드는, 잠시 숨이 턱 막힐 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과연 우리는 무사히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그곳에서 저는 해고의 아픔을 달랠 수 있을까요?


다음 이야기도 함께 걸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