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파를 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질 걸?
평소에 정보를 찾기 싫어하는 게으른 이 여행자가 웬일인지 교토 여행의 전문가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출연자들은 교토의 대표적인 미슐랭과 숙소에 대해 한참 떠들다, 니넨자카와 산넨자카의 미신으로 화제를 옮겼다.
"이 고개에 전설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가요?"
"이 고개에서 넘어지면 2년 안에 죽는다, 3년 안에 죽는다는 미신이 있어요."
"오? 우리나라에도 있잖아요!"
삼년고개 전래동화. 내 생애 그 이야기만큼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가는 스펙터클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할아버지가 삼년 고개에서 넘어지고, 자신은 곧 3년 안에 죽을 거라며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옆집에 있던 소년(전래동화의 특징상, 토끼로 대체되기도 함)은 자기에게 묘수가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까 한없이 우울했다. 그 할아버지가 꼭 우리 외할머니인 것만 같아서 동화 속 할아버지처럼 돌아가시면 어쩌나 속상하던지. 어린 나는 과몰입해서 울먹거리며 그 동화를 읽어내려갔다.
그 소년(토끼)은 그 고개에 가서 다시 넘어지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내가 거기서 또 넘어지라니, 그런 망발을 하냐"며 화를 냈다. 소년(토끼)은 화가 난 할아버지를 달래며 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한 번 넘어지면 3년, 두 번 넘어지면 6년, 세 번 넘어지면 9년, 그렇게 백 번 넘어지면 100살까지 살 수 있어요!"
전래동화 속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치며, 고개로 달려가 신나게 넘어지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현대에 와서 이 전래동화를 다시 보니, 한 번 더 가서 넘어지라는 소년의 묘수를 듣고 생이 줄어들까 봐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불안과 영생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아버지 역할에 우리 외할머니를 대입하면 여지없이 이해된다.
타지에 나가 돈을 버는 홀어머니 대신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할머니가 3년 만에 돌아가신다고 했다면, 할머니와 함께 떼구르르르 고개에서 굴러 멍투성이가 되더라도 그 불길함으로부터 할머니를 멀리 뗴어놓으려 했을 것이다. 삼년고개 이야기를 들으며 훌쩍거리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그런 나를 보며 '늙은이 가는 게 뭐, 슬프냐며' 죽음 앞에서도 덤덤한 이 시대 억척의 아이콘이자 테토녀 나의 할머니가 떠오른다.
고개가 정해준 3년이라는 미신도 인간의 생과 사의 진리 앞에선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던 9년 전, 할머니는 3년 고개에서 아무리 넘어져도 목숨이 늘어나지 않는 세계로 떠났다.
단 3년, 3일, 3초 고개라도 좋으니,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망자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허구적인 소망 앞에선 땡깡을 피워서라도 원하는 걸 얻어내는 철부지가 아이가 되버린다.
토토로라는 시대를 초월한 위로
산넨자카와 니넨자카로 가는 후미진 골목에서 귀여운 숲의 정령이 우리를 불렀다. 토토로였다.
디즈니만큼이나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성인들의 영원한 동화, '스튜디오 지브리'. 두터운 팬덤을 자랑하는 지브리는 대중적이면서도 독보적인 IP(지식재산권)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로 파생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지브리를 대표하는 최고의 캐릭터로 10년 연속 '토토로'가 꼽힌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아닌, 왜 하필 어딘가 뚱하고 색깔마저 칙칙한 회색 괴물 '토토로'가 이토록 오랫동안 독점적인 사랑을 받고 있을까?
그 비결은 토토로가 가진 '무해함'과 '시대를 초월한 위로'에 있다.
이 영화의 백미이자 토토로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비 오는 버스 정류장' 신이다. 아픈 엄마와 일 때문에 늦는 아빠를 기다리며 지쳐 있는 사츠키와 메이 자매 곁에, 토토로는 슬그머니 다가와 나뭇잎 한 장을 머리에 얹고 나란히 선다. 사츠키가 건넨 우산 위로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자, 토토로는 그 소리가 재미있는지 엄청난 덩치로 발을 굴러 나무 위의 빗방울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난생처음 듣는 빗방울 '음악'을 선물 받은 듯 즐거워하던 토토로는, 그 답례로 사츠키와 메이에게 언제든 자신을 부를 수 있는 도토리를 건넨다.
하늘을 나는 팽이를 타고 자매를 품에 안은 채 밤하늘을 날아오르고, 길을 잃은 메이를 찾기 위해 고양이 버스를 불러주는 여정 속에서도 토토로는 결코 위대한 영웅처럼 굴지 않는다. 아이처럼 활짝 웃는 토토로의 모습은 이 캐릭터가 가진 무구한 다정함을 대변한다. 그저 아이들의 순수한 불안을 묵묵히 받아내고 지켜주는 든든한 '안전기지'가 되어줄 뿐이다.
이 스토리를 보고 나면 토토로의 칙칙한 회색은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질리지 않는 자연의 색이며, 뚱한 표정은 그 어떤 편견이나 평가 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 같은 다감함의 증거라는 걸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 후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랑하게 된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을 품어주던 따뜻한 토토로의 품은 어른이 될수록 기댈 곳이 부족해지는 현대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영혼의 안식처가 됐다.
일본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지브리' 굿즈를 보며 행복해하고, 어떤 걸 고를지 고민하는 손님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해고라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순진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숲속의 정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허무맹랑한 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약한 현대인에게 나를 잃지 않는 순진하지만 끝내 지켜야 하는 인간의 자세를 기르게 해 준 것만으로도 지브리는 이 시대에 어떤 예술가보다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동심을 지켜준 토토로, 수많은 지브리 캐릭터에게 이 미약한 글로나마 고마움을 전한다.
지브리 동산을 조금 돌다 보니 이미 니넨자카에는 인파가 가득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기념품 샵, 말차 아이스크림, 쿠키슈, 모찌 가게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일본 전통 가옥을 리모델링한 상점들에 눈이 돌아갔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신경을 끄려 노력하며 올라가야 했다.
시간은 벌써 11시. '그곳'에 조금만 늦게 도착하면 그 후 점심 일정에도 차질이 생긴다. 대충 봐도 이 관광지 안에 있는 인파가 점심을 해결할 만큼 식당이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보나 마나 웨이팅을 하거나 밥을 쫄쫄 굶을 것 같다는 불안한 확신이 피어오른다. 흥미로운 상점들은 '그곳'을 먼저 보고 느긋하게 감상해도 늦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우리의 목적지 '그곳'은 바로 청수사(기요미즈데라)다. 교토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1994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청수사는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이곳에는 대표적인 탑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청수사 매표소로 가는 길에 처음 마주하는 '산주노토'라는 붉은 주홍색을 띤 삼층탑이다.
그리고 표를 끊고 본당을 지나 올라가면 보이는, 붉게 물든 단풍과 푸른 가을 하늘이 대비되며 절경이 펼쳐지는 '지슈신사'. 마지막으로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목조탑 '호칸지(야사카의 탑)'가 있다. 호칸지는 청수사 외부에 있지만, 청수사와 니넨자카, 산넨자카를 감상한 후 해 질 무렵 골목길 가로등이 켜질 때 이 탑을 배경으로 뒷모습 사진을 찍는 것이 교토 여행의 유명한 대표 스냅샷 스팟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청수사의 산주노토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너무 많은 인파에 압도된 나머지 나는 사진을 찍을 경황도 없었다. 함께 가져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한 장을 남겼다. 잠시 뒤 현상된 사진에는 나보다 빛과 사람들이 더 많이 찍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슬쩍 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셀카봉으로 여유롭게 사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저런 걸 챙겨왔어야 했나, 하지만 '저렇게 부산스럽게 찍어야 하나', 모두 같은 포즈로 같은 미소로 사진을 찍는 모습에 시시함과 지루함을 느꼈다.
나는 이곳에서 탁 트인 하늘과 고즈넉한 사찰의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불만을 느꼈다. 내 회사생활도, 내 해고도 그랬다. 한 번도 상상한 적 없고 원한 적 없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정말 내가 해고가 되었어야만 했는가.
그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타국까지 와서 조용히 사유하고 싶었지만, 이게 뭔가. 이렇게 평범한 무리에 싸여 나라는 사람을 돌아볼 기회는커녕, 제대로 관광도 힘들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서 벗어나 이 인파에 파묻혀 다음 목적지로 내려가는 일 말고는 특별함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나를 둘러싼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선 나는 비참한 해고자도, 자괴감 드는 백수도 아닌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언제나 특별하고 싶다는 소망.
비범해야 된다는 강박.
그 편견이 나를 얼마나 좀먹었는지 생각하게 됐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특별한 것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는 행태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대중들의 평가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하는 평범함을 거부해야만 나의 창의성이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편헙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이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 중에 하나라고 자각하는 것은 타인을 나와 같은 선상의 존재로 바라보며 나와 그를 굳이 열등하거나, 우열한 사람으로 가르지 않게 된다. 그건 진정한 자존감을 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그 첫걸음을 떼지 않았던 나는 인간의 보편성에서 얻을 수 있는 편안함과 연대감을 놓치고 있었다.
셀카봉으로 유난스럽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뭐가 평범한가.
설령 평범하더라도 그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지구에 나라는 존재는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해고라는 사건도 그 흔한 일 중에 하나다. 해고를 겪지 않고 싶지만, 지구에는 훨씬 더 억울하고, 다양한 일이 일어난다. 그리 부족하지도, 그리 유별나지도 않은 것이다. 그 보편성이 내게 힘을 주었다.
'너가 그렇게 못난 건 아니야.'
타인이 얼마나 잘하나 경쟁의식을 가지고, 들끓는 열등감에 몸부림쳤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뒤이어 후회가 따라온다.
남들 다 하는 것도 따라 해 보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도 도전해 보고. 그런 유연함이 필요한 것인데 나는 어쩌자고 한 면만 선택하며 살아왔을까.
다음 여행에서는 꼭 셀카봉을 들고 가야지.
늦었지만 내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평범함'이라는 녀석을 한껏 사랑해 줘야지.
니넨자카와 산넨자카 곳곳에는 유명한 가게들이 입점해 있었다.
"오 저기 어때?"
"저기 가보자."
출출하던 차에 후리카케가 뿌려진 미니 주먹밥을 받아먹었다. 그 풍미와 감칠맛에 못 이겨 와글와글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후리카케 작은 용량 하나와 멸치 다시 국물을 우릴 수 있는 티백 1개를 샀다. 여느 관광지의 최우선인 '스피드한 계산'을 마치고 옆 상점으로 갔다.
목이 마르던 차에 불투명한 초록색 말차 음료를 시원하게 한 잔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차 아이스크림'에 줄이 길게 서 있었다. 그 아이스크림의 비주얼을 보자마자 음료 말차는 밥 먹고 나서 마셔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순식간에 바뀌었고, 얼른 줄에 합류해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적당히 달콤하다가 진하게 차오르는 쌉싸름한 녹차 향이 여행자의 피로를 달래주었다.
"밥을 어디서 먹을까."
"좀 찾아볼까?"
"잠깐만."
"왜?"
"아, 나 밧데리 없다."
"헐. 나돈데."
현대 여행자라면 필수적으로 챙기는 '보조배터리'를 하필 숙소에 두고 온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닌 것이, 우리 둘 다 '배터리'를 설명하라고 하면 '떨어지면 채우는 것, 채울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정도. 해외여행에서도 그 개념은 그대로 적용됐고, 그렇게 숙소를 어떻게 가는지도, 핸드폰 밧데리를 충전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대바카라 없는 철부지 두 명이 탄생했다.
여행 오면 모든 게 순탄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람?
우리는 어떻게 이 난관을 해결해야 할까.
밧데리 하나 없이 그렇게 우왕좌왕했던 그날, 지나고 나니 웃음만 나네요.
완벽하게 다 채우고 떠난 여행이었다면 이런 허당미 넘치는 순간들은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역시 여행은 계획대로 안 풀려야 이야깃거리가 생기나 봅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밧데리 대신 당분과 카페인을 든든히 채우고 떠난 하루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교토에 자리 잡은 블루보틀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잠시 숨 돌린 이야기,
그리고 마법에 이끌리듯 조명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만난 어느 쇼콜라티에 가게에서의 동화 같은 순간까지!
뒤늦게 발견해서 더 반가웠던 츠타야 서점도 함께 구경시켜드릴게요.
평범한 오후 하나가 또 어떤 사고(?)를 치고 어떤 웃음을 안겨줄지, 쓰는 저도 궁금해지네요.
다음 이야기에서 뵐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