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차려낸 제사

제사,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쌓여 하나의 몸짓이 되는 일

by김원진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과 함께하는 일이 줄어든다. 여든을 바라보는 두 분은 기력이 쇠해, 여행은커녕 가까운 나들이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남은 힘을 다 짜내어 끝까지 붙드는 것이 하나 있다. 제사다. 한 시절을 함께 보낸 가족과 친지가 한 분씩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모님은 곧 당신께 닥칠 일을 미리 보는 듯 부쩍 외로움을 타신다. 떠난 이들을 향한 그리움도 그만큼 깊어지는 모양이다. 노년의 외로움과 무기력, 그리고 삶의 끝자락에서 밀려오는 두려움을, 윗세대 어른들은 제사라는 의식에 기대어, 떠난 이들을 추모하며 밀려드는 슬픔을 달랜다.


솔직히 나는 무언가에 기대는 편이 아니다. 자의식이 강한 탓인지, 사람의 약함을 인정하기 싫은 오만 탓인지, 종교도 멀리해 왔고 부모님이 그토록 지키려는 제사도 썩 반갑지 않다. 푸짐하고 기름진 음식도, 까다로운 격식도, 내겐 그리움보다 형식에 가까워 보였다. 심지어 마을공동체가 흩어진 지 오래고 저마다 떨어져 사는 시대에, 이 상차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주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해마다 성의껏 그 상 앞에 서는 까닭은 하나다. 그 행위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 부모님의 심정을, 나는 존중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런 내 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가끔 농담처럼 이르신다. "나 죽고 나면 제사상에 내가 좋아하는 소주 꼭 올려라. 너 좋아하는 차 우리지 말고. 알았지?"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요즘은 코끼리나 고래도 동료의 죽음을 애도한다지만,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누군가를 오래 그리워하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에게 가장 짙은 듯하다. 그 그리움을 온몸으로 지켜내는 부모님이 있기에, 나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할아버지와 가물거리는 할머니, 홀로 쓸쓸히 떠나신 큰아버지, 그리고 한때 집안에 머물렀다는 이름도 모를 누군가까지, 해마다 함께 기리며 상을 차리고 절을 해왔다.


나는 부모님이 그리워하는 이들을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리워하는 방식에 다 동의하지도 않는다. 다만 누구에게나 그리운 대상이 있고, 나 또한 나이 들수록 무언가를 그리워하리란 것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 어렴풋한 동류의식이, 결국 부모님의 제사를 지켜드리는 셈이다.


부모님의 기력이 사위어가듯, 제사상의 나물도 일곱 가지에서 다섯 가지로, 요 몇 해는 세 가지로 줄었다. 한때 갖은 논리를 들어 철석같이 지켜야 한다던 격식이 이제는 많이도 가벼워졌다. 내가 줄이자 할 때는 꿈쩍 않던 것들이, 이제 두 분 스스로 새 예법을 들며 슬그머니 덜어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 알 것 같다. 제사를 떠받쳐 온 것은 처음부터 격식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음을. 형식은 그저 그 마음이 오래 흘러 패인 자리였을 뿐임을. 그리움이 깊으면 상은 차려지고, 그리움이 옅어지거나 몸이 기울면 상은 가만히 작아진다.


언젠가 내 대에 이르면, 이 상은 더 단출해질 것이다. 어쩌면 기일 저녁, 좋아하던 자리에 차 한 잔 우려두고 잠시 그를 떠올리는 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것을 제사가 사라진 것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다. 모양이 달라졌을 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몸짓이 되는 일—그 오래된 의식은, 아마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한 끝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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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물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낡아가는 나'를 적는 산문 연재 《닦아도 중고지만, 매일이 새것 같아서》의 한 편입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 편씩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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