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연의 원흉, 크라이슬러 300C

나만 가족이 아니었나

by김만끽


2021년, 나는 아빠와 함께 내 이름으로 작은 부동산 투자법인 하나를 차렸다. 나는 회사 살림과 홍보를 맡고, 아빠는 그동안 해 오던 경매 강의와 상담으로 돈을 버는 식이었다. 나는 비영리단체 일을 그만둔 뒤였고, 아빠도 예전 회사 고문 자리를 내려놓은 참이라, 우리 둘 다 새로 시작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때였다.


새 출발을 앞둔 아빠는 부동산이나 현장 답사를 다니려면 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예전에 자기 회사를 운영할 때만 해도 구형 쏘렌토를 18만 킬로미터가 될 때까지 몰던 그때의 아빠는 이제 없었다. 제자들과 함께 일하던 회사에서 고문으로 지낼 때, 렌트해 준 고급 SUV를 타고 다녔기 때문인지, 임장에 필요한 차가 어떤 차인지 잊은 건지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아빠 뜻에 따라 1,200만 원대의 중고 크라이슬러 300C를 경매로 낙찰받았다. 그 회사에서 이상한 외제 차 물이 든 것 같았다. 막 시작한 우리 법인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른 외제 차가 나와 가족의 관계를 박살 낼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내게는 절연의 원흉인 셈이었다.


어느 날, 해운대 본가에 가보니 크라이슬러가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차를 몰고 어딜 갔나 보다 했는데, 아빠는 집에 있었다. 차를 본가에 둔 것은 그동안 아빠가 고생하기도 했고, 나는 젊어서 걸어 다니면 된다는 생각에 차를 타고 다니라 둔 것이었다. 물론 차 구매 대금이 아빠로부터 나오기도 했기에 나에겐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차는 도대체 어딜 갔단 말인가?


방에서 거실로 나온 아빠에게 차의 행방을 물어봤다. 아빠는 차는 평택에 있는 겨레붙이네 집에 가 있다고 대답했다. 도대체 왜 거기 있느냐고 묻자, 조카가 유치원 등원 차를 타면 1시간이나 걸리는데 자기 아빠 차는 담배 냄새나서 타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애지중지하는 손주가 닳을까 나와 상의도 없이 덜렁 두고 왔다고 했다. 조카의 등원 길이 1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아버지에게 경고만 건네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회사 대표가 난데, 상의는 해야죠. 회사 차에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바카라임져야 되잖아요”

웃으며 말하는 아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내 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는 아빠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러는 거야?”


아빠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아빠의 ‘주먹호구식 경영’ 스타일은 여전했다. 그렇게 크라이슬러 300C는 나의 것도, 아빠의 것도, 법인의 것도 아닌 채 엉뚱한 집에 있었다. 나는 그 차가 언젠간 돌아오리라 내심 믿었던 모양이다.


그사이 회사 운영은 점점 빠듯해졌다. 세금이 밀려 압류예고장이 날아오곤 했다. 한 번은 아빠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빠, 세금이 밀려서 계속 압류예고장이 오는데, 차를 파는 게 어떨까요.”


아빠는 세금은 나중에 내도 되는 것이라며 내 입을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에도 막힘이 생겼다. 2022년 내가 공공 매입임대주택으로 들어가려고 한 집을 포기해야 될 처지였다. 3년 전, 광안3동에 살 때 받았던 청년 월세 대출 980만 원을 갚지 않으면 그 집을 포기해야 하는—지금은 청년 월세 지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상황이었다. 나는 다시 차를 팔자고 제안했다. 아빠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차는 건드리지 말자.”


아빠는 당장 내 삶의 막힘보다, 차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 무렵 나는 아빠의 다른 법인을 통해 월 150만 원을 급여 명목으로 받았다. 그중 80만 원만 생활비로 쓸 수 있었고, 나머지 70만 원은 법인세와 부가세를 내는 데 들어갔다. 서류로는 급여였지만, 실제로는 내 이름으로 회사 세금을 대신 내는 돈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통장이든 법인 통장이든 남는 돈은 늘 빠듯했다. 나는 80만 원만으로는 생활을 감당하기 힘들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부모님은 이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다 그 해였는지 그 이듬해였는지, 기름값이 갑자기 오르던 연말의 성탄절이었다. 평소 왕래를 하지 않던 겨레붙이에게 전화가 왔다. 늦은 생일 인사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가 하는 말에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지금 경윳값도 비싸고 크라이슬러 유지비도 너무 많이 들어. 이 차를 팔고 그 돈으로 내 중고차를 살게.”


이 자식은 얌체도 아니고 도둑놈이었다.


겨레붙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아빠의 말이 있었다. 아빠는 겨레붙이에게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 받아온 크라이슬러를 내 법인에 등록했다고 거짓말 했다. 그 회사가 아빠에게 렌트해 준 차는 똑같은 기종이었지만 차량 번호와 색깔이 달랐다.


겨레붙이는 아빠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제 입으로 차량 번호도, 색깔도 다르다고 했으니까. 차가 다른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도, 아빠 말대로라면 아무리 내 법인 차라도 부모님 허락만 받으면 되겠다고 짱구를 굴린 모양이다.


나는 차근차근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법인 차를 판 돈은 회사 돈이다. 그 돈을 아무 이유도 없이 너에게 주면, 세무서는 대표인 내가 회사에서 빼 간 돈, 즉 ‘가지급금’으로 본다. 그러면 결국 갚을 바카라임에 더해 세금도 대표인 나에게 돌아온다고.


겨레붙이는 그 회사가 뭐 그리 큰 회사라고 국세청에서 그렇게 조사하겠냐고 마음껏 떠들었다. 그럼 아빠 회사는 크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왜 구치소까지 다녀왔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심장으로 말을 삼켰다. 아빠가 한 번 구치소에 다녀온 일로 겨레붙이가 적어도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정신을 차렸을 줄 알았는데. 경각심을 가진 건 나뿐이었을까.


너무 괘씸하고 기가 막혀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마침, 성탄절이라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도 나눌 겸. 어쨌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내 이야기를 엄마는 듣더니


“당연히 팔아서 겨레붙이네 차 사라고 돈을 줘야지. 지금 기름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면서!”


라고 했다. 아차, 말을 맞췄구나 하는 생각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다시 엄마에게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엄마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자기 의견과 다르게 말하면 꼭 이렇게 말했다.


“됐어. 됐어. 끊어.”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 말은 매번 내 혀를 자르는,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엄마의 “됐어 됐어 끊어.”는 엄마 말만 말이고 내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내 인격이 무시되는 일이었다. 그동안 애써 참아왔는데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약속이 있다는 엄마의 말에 카톡에 대고 장문의 글을 남겼다. 왜 나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냐부터, 엄마 아들이 그렇게 말하면 말려야지 무슨 생각하는 거냐, 여태껏 쌓여 온 가지급금에 지금 이것까지 더하면 나중에 누가 처리할 거냐, 엄마냐, 아빠냐, 겨레붙이 놈이 할 거냐. 와다다다다다다. 엄마는 읽고 답이 없다. 무언의 공격인지, 무시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 또한 불화살이 되었다.


나는 다시 이 일의 원흉이 된 아빠의 거짓말을 들고 아빠한테 전화했다. 왜 겨레붙이에게 거짓말을 해서 오해를 불러일으켰냐고 물었다. 아빠는 도리어 화를 냈다.


“어디 아빠한테 거짓말이라고 하니?”


“그럼, 그게 거짓말이지 진실이야?”


“그건 그냥 하는 말이라고 대충 알아들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여기서 ‘이 가족들이 모두 똘똘 뭉쳐서 나 하나 바보 만들기로 작정했구나. 이 집안에 내 편은 없고, 기댈 곳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잠식했다. 특히 내가 어려워 차를 팔자고 이야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다가, 아들내미가 차 이야기를 꺼내니 불쌍해하며 들어주는 꼴에 열불이 터졌다.


그 순간부터 모든 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법인 대표직을 사임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동안 급여 명목으로 받았다가 세금으로 냈던 돈을 돌려달라는 내용증명까지 보냈다.


아빠는 내가 보낸 절연 메일에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는 내용의 답변을 보냈다. 철이 덜 들어서 부모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거라고. 표현되지 않는 사랑을 내가 대체 어떻게 본다는 말인가.


배신감과 억울함에 울며불며 살다가 겨우 적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창 밖에 새소리가 지지배배 울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이제 내가 숨을 쉬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6개월쯤 지나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평생 해본 적 없는 양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두려워졌다. 힘든 현실에 혹시 다시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두려운 까닭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중 누군가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이 드리울 까 봐서였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는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니까. 한참 생각하다가 금요일에 식사라도 하자고 답을 보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좋지.’라고 답했다.


금요일, 엄마와 나는 우리가 자주 가던 송정 ‘완도횟집’에서 회덮밥을 먹었다. 송정 바다를 한 바퀴 돌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나눴다. 그렇게 한동안 아빠 없이 엄마만 만났다. 엄마만 미안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에 대한 미안함인지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사과를 모르던 엄마가 사과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를 만난 건, 엄마가 나와의 약속에 아빠를 몰래 데리고 온 날이었다. 기분이 언짢아 집에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느이 아빠, 요새 많이 아파.”


라는 말에 같이 밥만 먹었다. 차는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었고, 또 아빠의 사과는 끝끝내 듣지 못했지만, 우리는 가끔 만나 밥을 먹었다.




이전 15화동서고가도로를 달리던 엄마의 헌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