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의 밤, 구치소의 낮
아빠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엄마는 매일같이 구치소에 드나들었다. 오전 10시 10분. 첫 면회 시간이었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는 것도 사치였다. 해운대에서 학장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을씨년스러웠다. 아빠는 내가 엄마를 따라 면회를 갈 때면,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밥은 먹었니? 살이 좀 빠졌구나.”
나는 그때마다 아빠는 괜찮으냐고 묻고는 했다. 그러면 아빠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괜찮지 그럼.”
이라고 말했다. 그 질문은 아빠가 지금도 나에게 하는 유일한 질문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춥다, 내복이 필요하다, 성경바카라이 필요하다, 요구가 많았다. 자식에게는 하지 못할 말들이 있었나 보다.
솔직히 나는 학장에 가는 것이 좋지도 않았고, 귀찮기까지 했다. 아빠의 결정들이 다 이해되지 않는 데다 편두통으로 컨디션까지 오락가락하는 상황인데, 매일 간다는 것은 나에겐 심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리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나에게 매일 지치지도 않고 아빠한테 가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가는 날도 있었지만 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엄마는 집 거실에서 그 말을 했다. 엄마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로. 학장에서 해운대로 넘어오는 동서고가도로 위에서 난간벽 밖을 향해 그대로 들이박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했다. 내가 엄마와 같이 가지 않은 날들, 그 차 안에 엄마는 혼자였다. 난 왜 그 말을 듣고 측은지심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음마저 무심했던 나는 어째서 그냥 듣기 싫다는 생각만 했을까. 왜 엄마를 안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편두통 주화입마에 빠진 날이 많았다. 병원에 가면 얼마를 써야 할지, 내 뇌에 무슨 이상이 있을지 겁이 났다. 엄마가 아빠에게 가자고 할 때마다 나는 내 머리가 언제 아플지 몰라 동행하기 두려웠다. 엄마가 혼자 돌아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도 이미 편두통과 우울에 지쳐 있었다.
아빠가 구치소에서 여러 가지 맞물린 소송 소장들을 편지로 써서 보내면 엄마는 타이핑을 부탁했다. 머리가 아파 그마저 할 수 없는 날에는 엄마는 한숨을 쉬고는 했다. 그 한숨이 나를 찌르는 듯했다. 엄마는 그럴 때면 직접 타이핑을 했다. 우리는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고통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엄마의 심드렁한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오래 지나서였다. 가족이 있지만 혼자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부담이 어떤 것인지, 독립을 하고 나서 여러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안아주지 못한 그때를 다시 돌아보면서,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었던 나도 함께 생각한다.
아빠가 사업으로 넘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도 한 번 크게 집이 휘청거린 적이 있다. 주변 지인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집은 궁궐 같아 보였지만 가난했던 때가 더 많았다. 아빠는 자신을 100억 부동산 자산가라고 했지만 부동산은 팔리지 않으면 빚이 되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사람들은 우리 집 평수만 보고 꽤 잘 산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사업이 나자빠질 때마다 아빠 손아귀에 있던 모든 것들은 엄마에겐 짐이 되었다. 그 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에 띄는 질환들이 엄마 몸을 지배했다. 엄마는 입안에 침이 말라 따갑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엄마 앞니 두 개가 빠졌다. 경영 능력이 부족한 겨레붙이 대신 24시간을 찜질방에 매여 있었다. 새벽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빼고 넣는 것도 엄마 몫, 여탕에 사람이 없을 때, 수도세가 많이 나오지 않게 수도꼭지 안쪽을 잠그는 것도 엄마 몫이었다. 그 때문에 잘 먹고 자지를 못해 말라버린 얼굴은 소멸될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회피의 선택을 한 아빠를 미워했다. 아빠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저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 곁에 있어도 딱히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 자신이 짐스럽고 죄스러운 세월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런 시간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아빠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담보대출에 도장을 찍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나를 감옥에 가둬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여전히 나는, 내가 구경도 해보지 못한 3억 원에 삶이 휘청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아빠 탓을 하는 건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