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왜 도피를 택했을까 | 남겨진 가족에게 사진처럼 남은 기억
겨레붙이가 돌아왔다. 아빠를 뺀 우리 세 식구는 투자자의 얼굴을 한 여러 광인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을 만난 장면들은 아빠가 말하던 포토그래픽 메모리처럼, 내 가슴속에 지금 막 현상된 사진인 양 또렷이 떠오른다.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여러 장면들, 그 속에는 아빠 없는 우리를 협박하는 미친 사람들이 있었다.
아빠 환갑연을 거의 도맡아 준비했던 김종모가, 군복 차림으로 피켓을 목에 건 채 주말 내내 아빠 회사 앞에서 시위하다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집에 들어온 그는 뜬금없이 어디서 구했는지 가스총 같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 집 아들이 우락부락하고 무섭다던데, 나를 때리거나 협박하면 쏴 버릴 테니 아드님한테 허튼짓하지 말라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던 사람은 김종모 자신이면서,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협박했다. 돈 받으러 온 사람이 강도처럼 굴 일인가, 나이 꽤나 먹은 인간이 정말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집에서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는, 겨레붙이가 집에 돌아오자 진짜 맞아 죽을까 무서운 건지 결국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한 채 물러났다.
눈이 부리부리한 김모우는 엄마와 내가 잠이 든 시간마다 찾아와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발로 차는 일을 거듭했다. 동네 부끄러워 문을 열어주면, 그는 거실에서 엄마의 맞은편에 앉아 아빠 욕을 해대기 일쑤였다.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만 해도 ‘선생님, 선생님’ 하며 머리를 조아리던 인간이었다. 엄마에게 하도 욕지거리를 하고 심한 말을 퍼붓자 나는 그의 말을 녹음하면서 나지막이 쌍욕을 하고 그 자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인간은 자기 차 열쇠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하나로 딸내미 눈알도 파 버릴 수가 있어요!"
아빠는 출소한 뒤 여러 번 그를 만나서 "너에게 줄 돈은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고 했다. 그 후 김모우는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이름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여자가 만삭의 배로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초인종을 눌렀다. 생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문을 열지 않고 안방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엄마는 인터폰을 확인하더니 서둘러 겨레붙이를 깨워 나오라고 했다.
엄마는 인터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니가 아는 여자야? 니가 임신시켜서 온 거야?"
겨레붙이 입장에서는 억울하긴 했겠지만, 그 상황에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그 여자는 짐까지 들고 찾아와, 잘 곳이 없다고 했다. 아빠에게 투자한 오천만 원을 받아야 집을 구해서 살 수 있으니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만삭의 여자는, 소중하고 안락한 내 방을 보름 동안 차지했다. 불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면부지인 사람이 혼자 집에 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엄마와 나는 외출 시간을 각자 조절해야만 했다. 겨레붙이는 애초에 아빠 일 보러 간다고 나가면 그만이었기에, 오로지 집을 지키는 것은 엄마와 나의 몫이었다.
그 여자는 보름쯤 지나서야 우리 집을 떠났다. 엄마가 오천만 원을 언제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 후였다. 사실 갈 곳이 아예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애써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지리도 지랄 맞고 거지 같은 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여자의 부른 배를 떠올리면 마음이 버겁다. 뻔뻔하게 우리 집에 들어앉아 돈을 요구했던 그 여자에게도 화가 나지만, 그 여자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우리가 한심하게 여겨진다. 이 모든 일이 한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겨울에 떠났던 아빠는 일본을 거쳐 필리핀으로, 필리핀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름이 시작되려던 즈음이었다. 아빠가 한국에 돌아오자, 도움을 줄 거라 믿었던 제자들이 만남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믿음직스럽게도(?) 경찰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아빠는 경찰의 인도를 받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아빠는 경찰들의 인도에 따라 유치장에 갇혔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빠는 계속 무리수를 두었다.
언제 소환될지 몰라 불안했는지,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아빠는 서울 신림동 원룸촌에 방을 잡아 도피 생활을 했다. 나도 한 번은 그 원룸에 갔었다. 딱 내 방만한 크기에 화장실이 붙어있는 작은 크기의 방이었다.
“느이 아빠 불쌍하지 않니?”
엄마는 그 방에 있는 아빠를 보며 내게 연신 물어봤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도피생활을 택한 아빠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다시 묻지도 않았다. 누구도 딱히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가을이 시작되려던 무렵, 아빠는 엄마를 미행해 온 경찰들 손에 다시 잡혔다. 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조차 이런데,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를 뒤따라 온 경찰들을 맞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을까. 그녀의 까마득해진 마음을 추측할 수조차 없다. 그때 엄마를 생각하면 나는 너무 가슴이 아리다. 혹시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고 자바카라했을까 봐, 아직 마음 끝이 굳어가는 것 같다.
결국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아빠는, 괘씸죄에 도주 우려까지 더해져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아빠의 무리수는 구치소에 들어가서야 막을 내렸다.
구치소에 수감된 아빠는 그제야 거제도 망치리 펜션 사업의 실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망치리 펜션 공사는 거의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공사대금은 법인 계좌에서 지출되고 있었지만 땅과 건물 명의는 망치리 사업 법인의 이사 개인으로 되어 있었다. 농지는 법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빠는 그 이사라는 양반 명의로 땅을 취득하게 한 뒤 공사를 진행했다.
아빠는 그 이사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것 같다. 공사대금을 몇억 원씩 보내면서도 공사 현장에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사는 겨우 기초만 닦여 있었고, 골조조차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망치리 펜션 사업에 들어간 돈은 55억 원 정도였다. 눈먼 돈 55억. 그 숫자를 듣자 귀가 먹먹해지고 주변 공기가 거뭇해졌다. 알고 보니 그 이사 놈은 아빠가 하루에도 십여 군데씩 임장 하며 찾아낸 물건들을 낙찰받아 힘들게 번 돈으로 술과 노름질에 퍼붓고 있었다.
너무 기가 찬 아빠는 구치소 안에서 그놈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그 돈은 여기저기 산산조각 나 있었다. 아들, 마누라, 며느리 할 것 없이 온 식구에게 흘러 들어갔고, 이사 놈은 빌어먹을 노름으로 돈을 날려 먹었다.
아빠가 계속 돈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걸며 이사 놈의 목을 조이자, 이사 놈은 무바카라임하게 며느리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나는 그놈이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 '그럼 우리 돈은 어디서 찾나' 하는 허망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 이사와의 소송에서 이겨야만 했는데 그가 죽음으로 사건은 ‘피고인 사망’으로 덮였다. 그 때문에 아빠가 돈을 찾아 혐의를 벗을 방법도, 우리가 진실을 끝까지 쫓아갈 길도 함께 사라졌다.
처음 아빠 혐의는 배임 및 횡령이었다. 고소인은 경찰을 대동해서 아빠를 만났던 투자자이자 제자였던 이들이었다. 그 혐의는 무죄 처리되었다. 나중에 그 제자들은 다시 아빠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고소했고, 아빠는 그 죄로 2년 2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경매 낙찰 후 필요한 법적 문서에 대해 조언을 해줬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아빠를 씹던 껌처럼 필요할 때는 이용하다가 자기 뜻대로 소송이 되지 않자, 자기들에게 도움을 줬던 방법으로 아빠를 사지로 몰았다.
아빠가 없던 지난한 시간은 우리 세 사람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