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날, 우리 가족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애써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신을 알아가는 중이라고 쓰면서도, 나는 오래도록 지독하고 시린 겨울 같던 우리 이야기는 저기 뒷방 구석에 넣어두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곰팡내 나도록 계속 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도 이렇게 꺼내어봐야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견뎠는지, 또 견디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한 나도 이렇게 힘을 내어 글을 쓰며 살아 있는 셈이니.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다. 사람들은 돈을 움켜쥐기 시작했다.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 사업이 휘청거린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사업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아빠의 '주먹호구식 경영 방식'¹때문이었을까.
이제 와서 무엇이 문제인지 가려본들 무엇하겠냐마는, 이제부터 성공 가도를 달릴 것만 같던 아빠의 회사는 한순간에 휘청거렸다. 그 휘청거림의 중심에는 아빠의 부재가 있었다. 그 균열은 거제도의 한 지역농협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아빠는 그때 두 개의 법인을 운영 중이었다. 한 법인은 수원 장안구 찜질방을 낙찰받았다. 리모델링까지 마치고,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법인으로는 거제도 망치리 펜션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안에 전국 최초의 펜션을 짓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업이었다. 이때 나는 망치리 펜션 쪽 법인 감사이자 부산 본사 총무로 재직 중이었다.
2007년 12월,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와 함께 차를 몰고 거제도로 향하는 카 페리호에 올랐다. 차에서 내려 들어간 선실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갑판 위의 쨍한 추위가 두 뺨을 때렸다. 선실 안이 지루해 몸을 배배 꼬고 있던 내게 아빠는 벽에 걸린 배의 도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나라 조선소가 배를 정말 잘 만들어.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조선 기술이 형편없거든. 그래서 중국에서 조선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어떻게 하느냐! 우리나라나 미국 같은 나라에 '포토그래픽 메모리'인가 하는, 도면 같은 걸 한 번 보면 그 사진처럼 기억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보내서 기술을 베껴 간대."
나는 아빠 말에 반신반의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날 아빠는 흥분한 듯 보였고, 나는 그런 아빠를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거센 파도와 같음을 알지 못했다.
기억이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으련만. 아빠와 나는 우리 일이 언제까지고 잘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2008년 12월 23일, 아빠는 거제도 망치리 펜션을 계속하기 위해 수원 찜질방을 담보로 내놓았다. 그때만 해도 아빠는 사업이 더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그 찜질방은 원래 다른 법인 소유였지만, 우리는 그 찜질방을 담보로 지역농협에서 대출을 받았다. 아빠와 나는 각자의 이름으로 연대보증을 서고, 수억 원대 대출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후폭풍을 일으킬지 예상하지 못한 채, 부산으로 돌아와 일찍 퇴근했다는 것이 좋아, 당시 만났던 사람과 서면에서 낮 데이트를 즐겼다. 돌이켜보면 이날이 모든 날의 시작이었다.
2008년 말, 수원 찜질방이 첫 문을 열자마자 고혈압을 앓던 환자가 세상을 떠났다. 찜질방의 고온 환경 때문에 생긴 탈수와 혈압 변동으로 생긴 불상사라고 했다. 아빠는 도의적으로 고인의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나는 돌아가신 분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사람 죽은 찜질방’이라는 말이 퍼질까 두려웠다. 또, 돌연사이긴 했지만 유족들이 아빠에게 사고의 바카라임을 묻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이 사고 이후로 우리에게 닥칠 일들이 급물살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걱정의 그림자는 망자가 아닌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쌓이던 속삭임들이 어느새 피를 끓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찜질방 투자자들로부터 아우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돈에 예민해져 있는 그들에게, 찜질방을 담보로 거제도 망치리에 돈이 흘러갔다는 소문으로 그들의 혈압도 함께 터진 듯 했다. 아빠는 그런 그들에게
"망치리 펜션도 오픈만 하면 잘될 겁니다. 곧 대출금도 회수될 겁니다."
라며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들의 항의는 점점 거칠어졌고 아빠의 목을 더욱 옥죄어왔다.
숨을 돌릴 수 없어진 아빠는
"잠깐 머리를 식히고 올게."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국에 어딜 간단 말인가. 일이 해결되도록 해야 하는 사람이 가버리면 누가 일을 해결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아빠가 안쓰러웠다. 나는 적금으로 모아 둔 200여만 원을 달달 긁어모아 아빠에게 여비로 쓰라고 내놓았다. 이후 아빠와 싸웠을 때, 아빠는 받은 적이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어쨌든 나는 내 피 같은 돈을 내어줬다.
그런 식으로 아빠는 사건을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한 달, 두 달, 아빠의 회피는 이내 도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당시도, 지금도 아빠의 선택이 그들의 부아를 돋우는 데 큰 몫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도피하는 동안 이탈리아로 성악을 배우러 가서, 연애공부에 더 열심이던 겨레붙이는 강제소환 당했다. 한 달만 더 하면 오페라 데뷔를 할 수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징징댔지만 당장 아빠 회사 운영을 맡을 사람이 아빠는 겨레붙이 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겨레붙이를.
주먹호구식 경영방식¹
'주먹구구식'과 '호구'를 합쳐 글쓴이가 만든 말이다. 이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결국 호구같이 재산을 타인에게 내어주어 남 좋은 일만 했던 경영 방식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