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았지만, 시고 쓴
아빠와의 기억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지만, 따스한 기억들도 분명 존재한다. 아빠는 주말이면 일찍 일어나서 겨레붙이와 나를 집 근처 소라 미용실 밑에 있던 오락실에 데리고 다녔다.
내 기억으로는 100원만 있으면 두 게임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겨레붙이보다 어린 나는 기술이 부족해 오락을 오래 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또 다른 기억 하나, 나는 어려서 먹는 것과 걷는 것을 싫어했다. 먹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엄마를 괴롭혔다. 먹는 것을 싫어하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걷는 것도 싫어해 아빠를 괴롭게 했을 듯하다.
“아빠 업어줘.”
를 국민학교 저학년 때까지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만 걸어도 힘들다는 이유였다. 그는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언제까지 아빠 등에 업혀 다닐 거냐며 나를 타박했고, 엄마 타박이 계속되자 나는 자연스레 그의 따뜻한 등의 온기와 슬픈 이별을 해야만 했다.
우리 집은 격주에 한 번은 과자 쇼핑을 하고는 했다. 어릴 적에는 과자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었다. 내 과자 따로, 겨레붙이 과자 따로. 과자 양이나 금액이 너무 많다 싶으면 엄마가 어느 정도 제지를 하긴 했지만, 양이나 과자의 종류도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냥 우리는 고르는 기쁨을 누리기만 하면 됐었다. 아빠가 돈을 잘 벌어서 그랬을까.
지금은 그 방법이 나와 겨레붙이에게 좋은 교육 방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매번 넘치는 과자의 부유함 속에서 절제력을 배우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빠와의 기억은 어렸을 때라서 더 좋았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어려서 내게 좋은 기억을 많이 심어준 그이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80년대 생계와 현실이라는 무게를 핑계 삼아 그는 지인들과 화투와 술로 도원결의를 다지곤 했다. 엄마는 그 소박하고도 결의에 찬 오락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면부지 아무도 기댈 곳 없는 부산에 내려와서 두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항아리 속에 금이 숨겨져 있다는 금곡리 장가네 귀한 맏이 아닌가.
하지만 적당히를 모르는 사나이는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와 대문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이런 날이 비일비재해지자 둘의 마찰은 정전기가 당장 불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엄마와 마찰이 잦아지던 어느 날, 고주망태가 된 그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전기를 넘어 폭발을 일으켰다.
주로 일방적 폭행이었다. 겨레붙이와 나는 어렸을 때는 정확히 무슨 일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지는 몰랐기 때문에 두 사람의 감정적 폭발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다행히 그 손찌검이 우리 남매를 향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내가 7살이 되었을 즈음, 그는 술을 끊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폭력의 날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 날 엄마는 아빠에게 맞서고 저항했지만, 몸싸움 하던 중 넘어지면서 바카라상 위 압정에 얼굴을 다쳐 피를 흘린 채 병원에 갔다. 피를 흘리는 엄마의 모습은 비참해 보였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엄마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엄마가 그저 부인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30대가 되어 아빠와 함께 밤산바카라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술을 끊기로 한 날을 회상하며
“어느 날, 엄마랑 싸우고 또 손찌검을 하려는 찰나에 니가 그걸 보고 기겁해서 자지러지듯 울다가 뒤로 넘어가는데, 아차 싶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술을 끊었지.”라고 말했다.
그 후로 20여 년이 넘도록, 아빠는 두 번 다시 엄마를 손찌검하지 않았다. 술도, 담배도 그날 이후로는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다.
아빠는 내가 엄마를 살린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당신이 술을 끊었다는 것 자체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진 당당함이 있었다. 그 거센 폭력을 보고 자란 나는 여러모로 다행이구나 싶으면서도, 입 안에서는 시고 쓴 와인 맛이 느껴졌다.
✒️ 당신의 부모님에게도 이런 '두 얼굴'이 있었나요. 미워할 수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었던 얼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