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이렇게 퍽퍽한 것일까.
수진은 바카라상 앞에 앉아 통장을 내려다보았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몇 해 전에 본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그것만이 내 세상〉. 그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가족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애틋함과 싫증, 연민과 연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존재하는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 지금의 상황이 그 영화와 퍽이나 닮아 있었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었다. 부양한다는 것에 내 삶이 사라지고 수진이라는 존재가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덜커덕 걸리는 것은 언제나 가족이었고, 그래서 수진은 언제나 숨을 참듯 숨죽이며 살아왔다. 가끔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망상은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 깊이 젖어들지 못했고, 생각이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수진은 스스로를 추슬렀다.
매번 이런 성장통이 찾아왔다. 처음은 서른둘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때였다. 상훈이 어느 저녁에 말했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까요? 수진 씨네 가족도 뵙고 싶어요." 수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집이 좀 정신이 없어서, 조금만 있다가요. 그 웃음 뒤에서 수진은 자신의 가족을 그에게 소개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사실과, 그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 부끄러움은 짐이 되어 끝내 그 사람과 헤어지게 했다. 정확히는 수진이 먼저 손을 놓았다, 그가 가족을 만나기도 전에.
두 번째는 서른다섯이었다. 얼마 모으지 못한 목돈을 가족이 요구했다. 그때 수진은 다니던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지만, 돈 앞에서 퇴직을 포기하고 계속 다니는 쪽으로 타협했다. 그리고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수진은 퇴직했다. 정말 수진다운 삶을 살아 보려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며칠 전 불현듯 가족의 도움 요청이 왔다. 심장이 덜컥 무너져 내렸다.
매번 이 고통을 넘겼고, 넘길 때마다 매번 힘들었다. 이런 뒷바라지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은 이번 생의 업보가 아닐까 싶었다. 수진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이 문제를 풀지 못해서라고. 좋은 사람이 다가올 때마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수진은 통장을 덮었다. 도망치기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가족까지 바카라임질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다음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고,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진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자기합리화일 수 있다는 것을. 역량을 키운다는 핑계로 또다시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국에는 역량이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것을.
창밖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수진은 핸드폰을 들었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또다시.
그것만이 수진의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