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속도

by구기리

은혜는 찻잔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카페의 소음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가 웃었고 은혜도 따라 웃었다. 언제 웃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십 년이 넘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재미있으시죠?"

남자가 물었고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 달 사이 네 번째 소개팅이었고, 이제는 횟수를 세는 일조차 시들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창에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비쳤는데 낯설었다. 서른아홉. 그 나이가 실감나지 않았다. 스물다섯에 한 연애와 서른아홉에 하는 연애가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속도가 있는 걸까.


그날 밤 은혜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스물다섯의 여름을 떠올렸다. 대학교 앞 허름한 술집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은 문학을 전공했고 은혜에게 시를 읽어 주곤 했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고, 그와 함께 있으면 평범한 가로수 길도 낡은 버스 정류장도 모두 특별해졌다. 세 번을 만나기도 전에 가슴이 뛰었고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내려앉았으며, 그의 문자 한 줄에 하루가 달라지고 보고 싶어서 밤을 지새웠다.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졸업 후 그가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고 은혜는 서울에 남았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마음도 멀어졌고, 아니 사실은 그보다 먼저 마음이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만남에서 두 사람은 울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의 연애가 더 있었다. 서른에 만난 온라인 게임 선배와는 일 년을 사귀었고 서른다섯에 만난 동창과는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모두 끝났다. 언제부턴가 은혜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마음을 여는 일, 누군가를 믿는 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오늘 만난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에 다니고 말투가 정중했으며 은혜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다. 조건으로 따지면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그의 손이 우연히 닿았을 때도, 그가 문을 열어 주며 웃었을 때도 은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핸드폰에는 그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 주에도 뵐 수 있을까요?" 정중하고 친절한 문장이었다. 은혜는 답장을 쓰려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 찬물을 마셨다. 싱크대에는 아침에 먹은 컵라면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설거지는 내일 하면 되었다. 혼자 사는 집은 그래도 괜찮았다. 누구에게 눈치를 볼 필요도, 누구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는데 요즘 들어 이 적막이 무겁게 느껴졌다. 주말 오후에 혼자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명절에 "아직도 혼자야?"라는 질문을 받을 때, 친구들이 가족 사진을 SNS에 올릴 때. 그래서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하고 소개팅을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는 기뻐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네 나이면 아직 늦지 않았어." 그 말에는 안도와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거실 벽에는 오래된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스물다섯의 은혜와 그 사람이 바닷가에서 웃고 있었다. 그때는 그 웃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두근거림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몰랐다. 은혜는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졌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만은 선명했다. 세상에 우리 둘뿐인 것 같던 느낌, 손만 잡아도 행복했던 시간.


친구 미선은 작년에 재혼했는데, 상대를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나이 먹으면 보이는 거야.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젊을 때는 감정에 휘둘렸지만 이제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잖아." 합리적인 말이었는데 은혜는 그 합리성이 두려웠다. 사랑이 계산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어느 심리학 바카라에서 사랑에는 열정과 친밀감과 헌신이 있다고 읽었다. 젊을 때의 사랑은 열정이 강하고 나이 든 후의 사랑은 친밀감과 헌신이 중요해진다고.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도 열정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열정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은혜는 노트를 꺼내 한 줄을 썼다. "오늘 네 번째 소개팅을 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펜을 멈췄다. 한참 뒤에 이렇게 이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왜일까."

주말에 은혜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 엄마는 김치찌개를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어때?"

"음, 괜찮아."

"괜찮으면 계속 만나 봐. 네 나이에 고르고 고를 처지가 아니야."

엄마의 말은 현실적이었고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은혜는 반발심이 일었다.

"엄마는 아빠랑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엄마는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연애 같은 거 없었어. 중매로 만나서 몇 번 보고 결혼했지. 그래도 괜찮았어. 살다 보니 정이 들더라고."

"사랑한 건 아니었어요?"

"사랑? 그런 거 따질 형편이 아니었어. 먹고 사는 게 급했지."

은혜는 더 묻지 않았다. 엄마는 생존이 중요한 세대였고 자신은 감정이 중요한 세대였다. 그런데 정작 은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바카라상 위 달력을 보니 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십 대가 코앞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난주에 만난 남자였다. "은혜 씨,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전시회 같이 볼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선뜻 답장이 나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미선과 통화하자 미선은 계속 만나 보라고 했다.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오기도 하잖아. 나도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만나다 보니 좋아지더라고." 미선의 목소리는 행복해 보였고 은혜는 부러웠다. 미선은 현실을 받아들일 줄 알았고 더 이상 스물다섯의 사랑을 꿈꾸지 않았다.

그날 밤 은혜는 혼자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취기가 오르자 생각이 더 복잡해졌다. 만약 이 사람과 사귀다가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만약 이 사람이 마지막 기회인데 놓치면, 만약 시작했다가 얼마 안 가 헤어지면. 예전에는 이런 계산을 하지 않았다. 좋으면 만났고 싫으면 헤어졌는데, 지금은 모든 것을 따져 보게 되었다. 서른아홉의 일 년은 스물다섯의 일 년과 달랐고, 그래서 연애의 효율마저 따지게 되었다. 효율. 은혜는 그 단어에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연애인가, 투자인가.


며칠 뒤 은혜는 그와 전시회에 갔다. 그림도 좋았고 날씨도 좋았고, 그는 유머 감각도 배려심도 있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전시회를 나와 카페에 앉았고, 그가 커피를 주문하러 간 사이 은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에서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웃으며 걷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눈부셨다. 그때 은혜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바카라임이라는 것을. 마음을 열지 못해 이 관계가 끝난다면 그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은혜를 만나고 있는데 은혜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세요?"

돌아온 그가 물었다. 은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은혜 씨, 혹시 제가 너무 급하게 가는 것 같나요? 부담스러우시면 천천히 가도 돼요."

그의 배려가 고마웠고, 동시에 더 미안했다.

그날 밤 은혜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남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키, 외모, 직업, 성격. 아니었다. 모두 괜찮았다. 문제는 은혜 자신에게 있었다. 은혜는 여전히 스물다섯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 떨림과 설렘과 열정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랑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니, 꼭 필요한 걸까. 새벽 세 시, 은혜는 일어나 노트에 썼다.

*사랑에는 속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빨리 빠지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빠진다. 나는 천천히 빠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빠지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까. 두근거림 없이 시작하는 사랑도 괜찮을까. 계산하고 따지며 선택하는 사랑도 진짜 사랑일까. 나는 모르겠다. 여전히 모르겠다.*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고, 은혜는 아직 그 자리에, 시작도 끝도 아닌 어딘가에 서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주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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