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 귀환

홍주 귀환


충남 홍성읍 한가운데 오래된 골목이 있다. 옛 홍성고등학교에서 명동거리로 이어지는 홍고통이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런데 걷다 보면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작은 가게의 간판과 문구, 오래된 건물에 들어선 새로운 공간, 골목 담벼락 아래 누군가 심어놓은 수선화까지 이 동네를 아끼는 사람들의 흔적이 보인다.


한때 홍성읍의 중심이었던 이곳도 신도심 개발과 상권 이동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다. 로컬 창업가 집단인 집단지성을 중심으로 젤리스라운지, 독립서점, 양조장, 공방과 다양한 브랜드가 자리를 잡았다. 갤러리와 극단, 미술관 같은 문화공간도 있다. 홍고통은 쇠퇴한 원도심 골목에서 크리에이터와 독립사업자가 모이는 작은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변하고 있다.


홍고통의 변화가 흥미로운 것은 홍성에서 처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성에는 이미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로컬 실험 가운데 하나가 있다. 풀무학교에서 시작해 홍동마을과 문당리로 이어진 유기농업과 협동조합, 마을공동체와 로컬교육의 생태계다. 오늘날 전국에서 로컬을 이야기하지만 홍성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지역에 뿌리내려 자신이 원하는 삶과 일을 만드는 실험이 계속 돼왔다. 그런 의미에서 홍성은 한국 로컬의 성지다.


그런데 홍성에는 역설이 있다. 이렇게 강한 역사와 지역문화를 가진 도시이면서 정작 중심성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다. 역사적인 중심은 홍성읍에 남아 있고 충남도청을 비롯한 광역행정 기능은 내포신도시로 이동했다. 광천은 독자적인 상업 중심지를 형성했고, 홍동과 문당리는 전국적인 로컬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홍성의 미래는 이 흩어진 힘을 다시 연결하는 데 있다. 그 출발점은 홍성이라는 현재의 행정구역을 넘어 오랫동안 충남 서부의 중심도시였던 홍주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홍주 귀환은 옛 이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다. 홍주가 가졌던 지역 중심성을 오늘의 조건에서 다시 만드는 일이다.



홍주와 결성이 만난 도시

그렇다면 홍주는 어떤 도시였을까. 오늘날의 홍성군이라는 경계만 보면 홍성이 왜 충남 서부의 중심도시여야 하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의 행정구역을 걷어내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공간질서가 나타난다. 홍주는 오랫동안 주변의 여러 고을을 연결했던 내포의 중심도시였다.


조선시대에는 홍주목이 설치돼 주변 지역의 중심 역할을 했고, 1895년 지방제도가 23부제로 개편됐을 때에는 홍주부가 설치돼 22개 군을 관할했다. 오늘날 홍성군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홍주를 중심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충청도라는 이름의 역사에서도 홍주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이름에서 만들어졌지만 역사적으로 도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공주와 홍주가 충주나 청주를 대신했고 ‘홍청도’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홍주는 단순한 작은 고을이 아니라 충청 지역의 이름을 구성할 정도의 위상을 가진 도시였다.



그 중심에는 홍주읍성이 있었다. 읍성 안에는 관아와 행정시설이 있었고 주변으로 시장과 주거지가 형성됐다. 지금도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 등이 남아 있다. 홍주읍성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한때 이 지역의 행정과 상업이 집중됐던 중심부의 공간적 기록이다.


현재의 홍성군은 옛 홍주군만으로 만들어진 지역이 아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주군과 결성군이 통합되면서 홍성군이 만들어졌다. 홍성이라는 이름도 홍주의 ‘홍’과 결성의 ‘성’을 결합한 것이다. 오늘의 홍성은 태생부터 홍주와 결성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공간의 결합인 셈이다.



이 사실은 오늘의 홍성 공간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홍성읍이 옛 홍주의 중심이라면 남부에는 옛 결성권의 역사와 생활권이 있다. 이후 철도와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한 광천은 이 남부권의 강력한 상업 중심지가 됐다. 따라서 홍성군을 홍성읍 하나의 중심과 그 주변부로만 이해해서는 현재의 공간질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홍주라는 이름은 행정지도에서 사라졌지만 홍주읍성, 홍주초등학교, 홍주문화회관 등 여러 공간과 기관에 남았다. 하지만 『지역의 질서』가 주목하는 것은 이름보다 중심성이다. 과거 홍주가 중요했던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행정과 재판, 시장과 교통을 위해 홍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주 귀환의 질문도 분명하다. 오늘의 홍성은 다시 주변 지역 사람들이 찾아오는 중심도시가 될 수 있는가.


여섯 개의 앵커

그 질문에 답하려면 과거의 홍주에서 현재의 홍성으로 돌아와야 한다. 역사적 중심성은 오래됐다는 사실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행정과 교육, 의료와 상업, 문화를 위해 실제로 찾아오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홍성에 그러한 중심 기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여섯 개의 앵커를 통해 살펴보자.


첫 번째는 행정·사법이다. 이 분야에서는 홍주의 오랜 중심성이 오늘까지 이어진다. 홍성에는 군 단위 행정기관뿐 아니라 주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사법 기능이 자리 잡고 있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은 홍성 뿐 아니라 예산·보령·서천을 관할한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하나의 군이지만 사법 기능으로 보면 홍성은 지금도 여러 시군을 연결하는 지역 중심지다.


여기에 내포신도시가 등장하면서 홍성은 다시 충남의 광역행정 중심 기능을 얻었다. 충남도청을 비롯해 교육청과 경찰청 등 광역기관이 들어섰다. 그러나 돌아온 중심성은 옛 홍성읍이 아니라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에 걸쳐 조성된 새로운 도시에 자리 잡았다. 홍성은 도청 소재지가 됐지만 역사적 도심과 광역행정 중심지는 공간적으로 분리됐다.


두 번째는 교통이다. 장항선은 홍성의 근대 도시구조를 만든 중요한 축이다. 홍성역은 홍성읍과 외부를 연결했고, 광천역은 광천의 시장과 상업을 성장시키는 기반이 됐다. 최근 서해안 철도망의 개선은 홍성과 수도권, 충남 서부의 관계를 다시 바꾸고 있다. 중요한 것은 빨라진 철도가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에 그치지 않고 외부 사람들이 홍성을 찾게 만드는 수단이 되는가이다.


세 번째는 의료다. 홍성의료원은 홍성군만을 위한 병원이라기보다 충남 서부 지역의 공공의료를 담당하는 거점이다. 중견도시의 중심성에서 의료는 중요하다. 일상적인 소비는 가까운 곳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모든 시군이 독립적으로 갖추기는 어렵다. 주변 지역 주민들이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홍성을 찾는다면 그 자체가 생활권 중심성을 유지하는 힘이다.


네 번째는 산업이다. 홍성은 농축산업의 기반이 강하다. 홍성한우를 비롯한 축산업이 대표적이고 홍동과 문당리는 유기농업이라는 또 다른 농업의 길을 개척했다. 광천에는 김과 새우젓이라는 강력한 식품산업이 있다. 거대한 제조업 단지보다는 농업과 축산, 식품가공처럼 지역의 생산기반을 활용하는 산업에서 홍성의 특징이 나타난다.


다섯 번째는 교육·문화다. 홍성은 전통적으로 충남 서부의 교육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상징적인 학교가 홍성고등학교다. 내포신도시로 이전하기 전 오랫동안 홍성읍에 자리했던 홍성고는 홍성 뿐 아니라 주변 지역의 학생들을 끌어들였고 지역 인재를 배출했다. 학교가 있으면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모이고 서점과 문구점, 음식점과 상점이 따라온다. 교육 역시 중심성을 만드는 중요한 도시 기능이다.


홍성에는 청운대학교와 혜전대학교도 있다. 군 단위 지역에 복수의 대학이 있다는 것은 홍성이 주변 농촌지역과 구별되는 고등교육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은 학생을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청년과 전문인력, 문화와 창업을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다. 이 대학들의 인적 자원을 홍성읍과 홍고통, 지역 산업과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홍성의 교육·문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곳은 홍동이다. 1958년 문을 연 풀무학교는 ‘위대한 평민’을 교육의 이상으로 삼았다. 교육은 좋은 대학이나 온라인 게임을 향한 통로에 머물지 않았다. 지역에서 일하고 살아갈 사람을 키우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시작된 교육운동은 유기농업과 협동조합, 출판과 도서관, 마을공동체로 확장됐다.


홍동마을에서는 풀무학교생활협동조합과 갓골빵집, 평촌목장, 그물코출판사, 밝맑도서관 등 다양한 조직과 공간이 만들어졌다. 인근 문당리에서는 친환경농업과 마을자치의 실험이 이어졌다. 오리농법으로 알려진 유기농업뿐 아니라 환경농업교육관과 농촌생활유물관을 만들고 장기적인 마을 발전계획도 세웠다. 학교와 마을 자체가 하나의 학습공동체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홍성을 한국 로컬의 성지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 전국에서 이야기하는 로컬푸드, 친환경농업, 협동조합, 귀농·귀촌, 마을공동체, 로컬스쿨의 원형을 홍성에서는 오래전부터 만날 수 있다. 최근 홍고통에서 나타나는 로컬 크리에이터 운동은 언어와 업종은 다르지만 같은 계보의 새로운 버전이다. 홍동에서 시작된 생활과 생산의 실험이 홍성읍의 창업과 콘텐츠 영역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여섯 번째는 상업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홍성읍에서는 홍주읍성에서 명동거리와 홍고통으로 이어지는 원도심이 전통적인 생활상권을 형성했다. 신도심 개발과 홍성고 이전으로 중심성은 약해졌지만, 최근 홍고통에 새로운 독립사업자와 크리에이터가 들어오면서 명동거리의 기존 상업과 새로운 로컬 비즈니스가 결합할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광천은 홍성읍과 다른 경로로 성장한 상업도시다. 장항선 광천역과 오일장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였고 서해안의 수산물과 주변 농촌의 농산물이 거래되면서 남부권의 상권을 형성했다. 광천의 힘은 유통에 머물지 않았다. 토굴새우젓과 광천김을 전국적인 상품으로 만들면서 시장과 철도, 수산물 유통이 식품가공과 브랜드 산업으로 발전했다. 광천은 홍성읍의 하위 상권이 아니라 옛 결성권을 배경으로 성장한 또 하나의 상업 중심이다.


흩어진 중심성

여섯 개의 앵커를 놓고 보면 홍성의 문제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중심 기능이 부족한 도시가 아니다. 행정과 사법, 교육과 의료가 있고 농축산업과 식품산업도 강하다. 무엇보다 다른 도시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로컬문화까지 가지고 있다. 홍성의 진짜 문제는 중심성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성의 분산이다.


이 분산에는 역사적 이유도 있다. 홍성군 자체가 홍주와 결성의 유니언으로 출발했다. 홍성읍이 옛 홍주의 중심이라면 광천을 비롯한 남부권에는 옛 결성의 공간질서가 남아 있다. 여기에 현대에 들어 내포신도시라는 새로운 중심이 만들어졌고 홍동·문당리라는 독특한 로컬 생산거점까지 성장했다.


따라서 오늘의 홍성은 하나의 중심과 주변부로 이루어진 군이 아니다. 홍성읍에는 역사·사법·교육·전통상업이 있고, 내포에는 광역행정·업무·신주거가 있으며, 광천에는 상업과 식품산업이 있다. 홍동·문당리에는 유기농업·협동조합·교육과 로컬문화가 집적돼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중심들이 한 행정구역 안에 공존한다.


중심성의 분산은 홍성군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홍주가 주변 고을을 연결하는 중심도시였다면 오늘날 홍성도 군 경계를 넘어 역할을 찾아야 한다. 홍성지원의 관할권과 내포신도시를 공유하는 예산과의 관계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내부의 거점을 연결하는 동시에 주변 지역이 필요로 하는 중심 기능을 강화해야 홍주의 귀환이 완성된다.


홍성의 과제는 따라서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기능을 다시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중심의 강점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하나의 도시체계로 연결하는 것이다. 홍주 귀환은 과거의 단핵도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중심성을 다시 조직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홍주 귀환

이제 홍주 귀환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첫째, 홍주읍성을 홍성읍 중심성 회복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읍성 복원을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홍주읍성에서 명동거리와 홍고통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하나의 보행권으로 만들고 역사와 상업, 교육과 문화, 창업이 함께 작동하는 원도심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 관공서와 학교, 시장이 만들었던 집적효과를 오늘의 도시 기능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둘째, 홍고통을 홍주의 새로운 창조지구로 키워야 한다. 집단지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창업 생태계를 확장하고, 독립서점과 공방, 양조장, 디자인숍 등 독립사업자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청운대와 혜전대의 인재를 연결해 홍고통을 지역의 창업과 문화 생산거점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셋째, 한국 로컬의 성지라는 홍성의 정체성을 도시 전체의 산업과 문화로 확장해야 한다. 풀무학교–홍동–문당리에서 축적된 유기농업과 협동조합, 교육과 출판의 경험을 홍성읍의 창업과 상업에 연결할 필요가 있다. 홍동의 생산자, 청운대와 혜전대의 학생, 홍고통의 크리에이터, 광천의 식품기업이 서로 만난다면 홍성은 로컬을 구경하는 곳을 넘어 새로운 로컬 비즈니스와 인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홍성군이 추진해온 ‘5대 로컬콘텐츠 타운’ 구상은 이런 방향에서 주목할 만하다. 홍성을 홍주·내포·광천·홍동·남당의 다섯 권역으로 나누고, 홍주는 창의문화, 내포는 광역 연계, 광천은 음식문화, 홍동은 유기농업, 남당은 해양문화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고유한 콘텐츠를 키우려는 구상이다. 중요한 것은 다섯 개의 타운을 개별 관광지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연결하는 것이다. 각 지역의 차이를 살리면서 하나의 홍성 로컬 생태계로 묶을 때 분산은 약점이 아니라 다양성이 된다.


넷째, 홍성읍·내포·광천의 역할을 분담하고 연결해야 한다. 내포는 충남의 광역행정과 업무·신주거 중심, 광천은 남부권 상업과 식품산업 중심, 홍성읍은 역사·사법·교육·문화·상업의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홍주와 결성이 합쳐져 만들어진 홍성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러한 다핵구조는 약점만은 아니다. 각 중심의 차이를 지우기보다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홍성의 경계를 넘어 생활권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가장 먼저 내포신도시를 공유하는 예산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사법·의료·교육·상업·문화 기능을 통해 보령과 서천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과의 관계를 넓혀야 한다. 과거 홍주의 행정구역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이동하고 교류하는 현대적인 홍주 생활권을 만드는 것이다.


홍주가 강했던 것은 사람들이 행정과 재판, 교육과 시장, 문화를 찾아 모였기 때문이다. 이제 홍성읍과 내포, 광천과 홍동을 연결하고 그 관계를 예산과 보령·서천 등 주변 지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홍주 귀환은 옛 이름이나 행정구역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홍주가 가졌던 지역생활권의 중심성을 오늘의 방식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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