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디자이너 민 C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오늘도 나는 집 서재의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다.
잠시 일을 멈추고 바카라상 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마스킹테이프들, 크기와 종류별로 가지런히 꽂혀 있는 Traveler's Notebook, 여행의 추억이 담긴 저널들, 스티커 바인더, 이제 막 도착해 사용될 날을 기다리는 스탬프들, 그리고 끝까지 읽지 못한 바카라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카라상 한가운데에는 16인치 MacBook Pro가 놓여 있다. 노트북 카메라 옆에는 작은 Cisco 로고 스티커 하나가 붙어 있다. 재택근무를 하며 Webex 미팅을 할 때마다 카메라를 열고 닫는 작은 슬라이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이 닿는 이 작은 스티커는 어느새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올해로 Cisco Systems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지도 어느덧 17년이 넘었다. 1997년 샌프란시스코 Academy of Art University를 졸업한 이후,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은 어느새 30년을 훌쩍 넘어섰다.
그동안 참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디자이너로 일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삼성전자에서 디자인팀장을 경험했고, 짧았지만 약 1년 동안 디자인 스타트업 에이전시를 태해란밸리에서 운영하기도 했다. 디자인이론 강사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도 보고.. 대기업, 스타트업, 에이전시, 학교, 그리고 닷컴 회사까지. 때로는 팀을 이끄는 디자이너였고, 때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으며, 또 어떤 때는 디자인과 코딩을 동시에 해야 하는 디자이너였다. 돌아보면 나는 한 가지 모습의 디자이너로만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술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어느새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고치며 디자인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그동안 수많은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이름을 알릴 만큼 거창한 프로젝트도 있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준 작은 디자인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바카라은 디자인 이론을 가르치는 바카라이 아니다.
한명의 현업 디자이너가 30년 동안 일하며 넘어지고, 배우고, 고민했던 이야기들이다.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 이제 막 슬롯생활을 시작한 주니어 디자이너들, 그리고 오늘도 현업에서 고민하고 있는 동료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디자인 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좋은 포트폴리오보다 더 오래가는 경쟁력이 무엇인지.
AI 시대에도 디자이너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자인을 '직업'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30년 동안 어떻게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었나요?"
사실 특별한 비결은 없다.
단 하나.
Don't work hard. Just enjoy your work.
억지로 버티지 말자.
즐기다 보면 어느새 30년이 지나 있다.
그 긴 여정에서 내가 배운 작은 이야기들을 담아보려는 첫 번째 기록이다.
부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 민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