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다리 세 개의 강남
울고넘는 박달재? 염천교? 아니 나에겐 울고 넘는 탄천이다. 나는 그렇게 강남을 옹호하고 싶다 못해 한번 탄천 건너 수서역 안쪽으로 들어가고팠다. 정확히는 양재천까지 닿아보고 싶었다. 한강변은 꿈도 꿔보지 않았다.
끝자락이라도 강남구 어딘가에 등기를 치는 일은 내겐 불확실한 직업으로 헤징할수 없는 일종의 위험으로부터의 도피, 리터럴리 지대(Rent)를 갖추는 행위였다. 어쩌면 트로피 혹은 상징자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보통 많이 욕하는 대상을 사실은 가장 희구하기도 하니까. 출근버스 창밖 탄천을 내려다보며 언젠가는 저기를 건너서 저 너머로 넘어가야지라고 맘먹던 날이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강남인지도 정확히 몰랐지만 말이다.
국장이 박살나는 날이면 배달도 끊겼다. 코스피 매도 사이드카에 이어 서킷브레이커 푸시알림이 폰화면에 떴다. 네이버에 알람을 언제 걸어뒀지? MTS를 스윽 열어봤다. 왜 갈땐 같이 안올라가고 내려갈땐 더 흐르는 건지, 흔한 개미한마리가 자전거에 걸터앉아 폰만 뒤지고 있었다. 오늘 어두운 옷을 입어서 그런가, 태양과 나 사이에 누가 거대한 돋보기를 껴둔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타들어가는 나와 달리 배달앱은 싸늘하게 식다 못해 얼어붙었다. 더불어 내 애착주식도. 이제쯤 사람들 군침 돌시간인데 밥생각이 싹 가셨나, 피크타임 콜사인거보면 가능성 있는 말 같기도 했다. 우선 그늘로 몸을 피해야 했다.
식당이 많은 송파대로쪽에 붙어있다가 탄천쪽으로 조금만 벗어나도 꼭 강남구 보내는 콜이 들어왔다.
“이정도면 건너가도 되잖아?”라고 배-쿠가 떠보는 느낌이었다.
“3,450원에 빈차로 돌아오면 뭐 봉사활동하시라고요?”
여기로 이사오고 처음 들어본 지명인 자곡동이었다. 세곡 내곡은 들었는데 뭐 쨌든 골짜기겠구나. 막상 가보니 평지였다. 가든파이브 옆 숯내교를 넘어가면 수서차량기지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가 배달지였다. 거절을 누르고 한참이나 주식앱을 만졌을까, 같은 콜이 그대로 들어왔다. 200원인가 프로모션이 더 붙어서 들어온 콜이 외치고 있었다.
‘이거밖에없어 인마.’
구치소옆을 지나 무성한 탄천습지를 훑으며 숯내교를 건넜다. 윤슬너머 백로와 왜가리가 서있으니 여기가 서울이 맞나 착각이 들었다. 착륙이 임박한듯한 공군 비행기는 한층 더 커진 그림자를 덮으며 지나갔다.
내년이면 아이의 입학이었다. 요즘 아내는 부쩍 이사생각이 많아 보였다. 원래 육아휴직 디데이였던 2027년도 이제 반년도 안남았는데 정해진건 하나도 없으니 나도 답답한데 아내는 오죽할까. 복직 후 만약 먼 곳으로 발령나서 주말부부가 된다면 처가 합가플랜을 정말 돌릴 예정이었다. 운좋게 내가 본사에 남더라도 등하교를 생각하면 처가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야하지 않겠냐는 내게 아내는 출퇴근만 서너시간 할거냐고 반대했다. 아내는 내 이직도 경우의 수로 넣고 불확실성에 힘들어했지만, 나는 그 케이스는 점점 가능성이 희박해져서 나대로 고민이었다.
지금 집을 처음 볼 땐 초품아까진 아니어도 큰길 건너지 않고 초등학교까지 걸어갈만해 보여서 좋았는데, 아내는 배정될 초등학교가 너무 작은 학교인 게 걱정이었다. 한학년에 반이 두개에 한반에 열명이 안된다 했다. 우리가 국민학교 들어갈땐 한반에 오십명인데, 그러면 좋은거 아니냐고 했다가 꽤 긴 답을 들었다. 과소학교를 기피하는 이유를 몇개 들어보니 나름대로 이해가 됐다. 생각해보니 놀이터에서 엄마들 어깨너머로 듣고 귓등으로 흘렸던 주제였다. 친했던 옆동 19년생 누나는 올해 초 입학에 맞춰 일원동으로 이사갔고, 10층 동갑내기는 얼마전 길건너 대단지로 이사 갔다.
나름 최소화한다고 하는데 왜이렇게 설거지거리는 많은지, 물소리 너머 대화가 분절됐다. 아내는 아일랜드 식탁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잘 웃고 참 낙관적인 아가씨였는데, 학부모가 되기를 앞두곤 점점 걱정인형이 되는 모습을 보며 덩달아 입꼬리가 쳐졌다. 동쪽이든 북쪽이든 길하나 건너면 대단지 아파트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들이 있는데 거기는 또 꽉꽉 차 있었다. 저정도면 과밀학교인가? 편의점만 잘되는 우리집 근처 상권엔 학원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생각해보니 미술도 그 아파트상가로 보냈었구나. 아이는 매트에 엎드려 마법천자문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무릎 꿇고 바닥의 머리카락을 주우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빌라촌인 우리동네만 아이들이 없는거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릇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발 무슨 아파트 살아야만 애낳는 세상이래?"
자곡동에서 역시나 빈차로 돌아오는 길, 수서역 콜이 하나 떴다. 지하철아니고 기차역? 역사에서 한참 헤맬거 같아 깠다. 다시 물길 너머를 보며 신호를 기다리는데 오라는 문정동 콜은 없고 또 수서 지하철 앞 오피스텔 지하상가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 콜이 강남뺑뺑이의 트리거가 될 줄 그땐 몰랐다. 볶음밥 하나를 픽업해서 동부간선도로 방향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거대한 임대아파트 지역이라 교통호재만 짧게 먹고 빠져야한다고, 거긴 애 키울곳은 아니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 좀 가려서 하라는 내게 돌아온 답은 “우리끼리니까”였다. 그땐 그렇게 그 문장이 역겨웠는데 다닥다닥한 실외기 간격과 입구 경사로의 전동휠체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쁜 말과 나쁜 주거환경 중 진짜 ‘나쁨’으로 표시할 수 있는건 무엇일지. 적어도 내 이중성이 메스껍긴 했다.
가락시장 가는 콜을 잡아 수서역과 가락동 사이 광평교를 건넜다. 이웃과의 탄천 조깅코스 출발지였지만 이제 러닝 안한지도 오래다. 어플에는 콜이 많다고 깜빡거리는 시장사거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지만 폰은 울리지 않았다. 괜히 주식앱 한번 열어보고, 장 후반이되니 아주 바스라져있네. 멀리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을 보니 오늘은 진짜 운동만 했다, 수입은 짤랑인데 거리는 이미 30킬로였다.
한참뒤 배민은 수서역픽업-일원역배달로 더 멀리 콜을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가기로 했다. 몇년 전 아기를 업고 대모산을 오르면서 속으로 점찍었던 드림하우스였다. 이름 들어도 모르는 페라리같은거 말고 19만 달린 1세대 파나메라정도에 해당되는 집이었던 일원동 아파트, 강남 마지막 저층 재건축인 그곳도 이제 진짜 뭐가 되는지 현수막이 가득했다. 요즘 호가가 람보르기니처럼 생경해져버려 가닿지 못할 단지로 들어갔다. 어차피 못살거라 생각하니 그냥 못나보였다.
“여기선 비싼차타시면 안되겠어요, 안긁고는 못배길거같아요 하.”
겹겹이 붙은 차 사이로 자전거를 요리조리 몰았다. 칸이 좁아 1층현관에 들어갈때는 입구 앞 검정수입차를 긁을까봐 미리 내려걸었다. 엘베없는 4층인데 하필 초밥이라 회랑 밥이 헤어질까봐 살살 두손으로 들고 올랐다.
“야이 이거 그냥 ‘썩구축’아녀?”
살 돈도 없으면서 포르쉐는 정비성이 어쩌니 어디가 구리다고 무시하는 댓글러처럼 신포도를 씹어대며 나왔다. 다시 수서방향으로 돌아가다 눈앞에 보이는 초등학교 정문 현수막에 이사간 옆동 아이는 여기 다니는 건지 궁금했다. 우리애가 진짜 잘 따랐는데.
이동네 사는 회사 아저씨는 산 아래라 조용하고 공기 좋은데, 또 대치동 라이드가 편하다고 추천했다. 못올거 알면서 그러시면 자랑인가싶었다. 강서구에 살면서 목동으로 학원을 다닌 기억으론 학군지에 대한 로망은 전혀 없었다. 대치동은 무슨. 그럼에도 이제는 학군지가 맞벌이의 유일한 답같은 시대가 돼버린 듯했다. 퇴근까지 아이를 맡길 곳이 학원이니까. 학군지가 아닌 동네를 잘게 쪼갤수록 대단지 아파트가 아닌곳엔 어린이가 없고, 그럼 근처에 학원이 없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클러스터의 반대말이 뭐지? 또 너무 멀리갔나.
돈 부족한 맞벌이면 오히려 회사에서 더 멀어지면 되는 걸까.
“가족들 다 좋아해, 애들도 잘 적응하고, 나만 불편하면 돼.”
일산 장부장 생각이 났다. 사실상 내 사수였던 부장님, 아마 70년생일텐데 재작년말부터 팀장자리는 내려놨다. 아직 다니시는지… 추억필터 잔뜩먹여 회상하면 부장님 좋은상사 노력하는 아빠였다. 다 튿어진 가짜 페라가모 벨트를 매고 액정깨진 폰을 쓰는 그에게 소주잔을 받으며 부동산 히스토리와 로드맵까지 강제로 알게되었다. 구로에 투자해둔 물딱지인지 뭔지 주택을 싸게 월세줄테니 들어와 살라던 애매한 다주택자였던 장부장에게 경제학 배운척 삐죽댔던 2013년 기억이 났다.
“부장님 지금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경제도 슬롯도 저성장에 따른 축소국면인데 부동산 몰빵이야말로 너무 위험한거 같은데요. 저는 버블 따라 안살거에요.”
“글쎄, 몇 년 뒤에 어떨지. 너는 결혼안하고 애도 안낳을거같지?”
이어서 당시에도 애매하게 예산초과라 임장 못했던 일원동의 몇 개 단지를 다녔다. 이젠 약국만 가득한 상가사이에서 어떤 김밥집이 거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지 그 집만 세콜을 탔다. 등줄기가 가방모양으로 다 젖어버려서 엘리베이터를 탈때마다 땀냄새가 날까 걱정되었는데, 평일낮 유동인구가 적어 누군가 같이 밀실을 공유할 일은 없었다. 회사많은 지역보단 부담스러운 상황이 덜하겠지만, 내 냄새와 몰골에 강남 끝자락에서 유난히 위축된 꼴이 우습기도 했다.
이제 여길 벗어날 생각을 해야 했다. 강남에서 송파가는 콜이야 권역이 다르니 바로 나갈 방법이 없겠지만, 방향이라도 잡고 콜을 타자. 하지만 동쪽으로 나아가다가도 배달지는 다시 역주행 일변도였다. 일원본동 이삭토스트를 찍고 다시 깊숙이 돌아가니 이거 원 미궁에 빠진것 같았다. 앞으로는 영영 갈 수 없는데 오늘은 정작 벗어날수 없는 이 역설은 뭐람. 왜 그렇게 가고 싶었을까? 은전한닢도 아니고 ‘그저 이 강남구 똘똘한 한채 등기를 치고싶었습니다.’ 따위냐고.
특별할거 없는 배경과 벌이에 왜 특별한 뭔가를 원하냐고 준엄하게 혼나는 하루였다. 뭐 다녀보니 특별치도 않지만, 아니 숫자가 특별하잖아요. 썩 안전할줄 알았던 직업이 생각보다 파사삭 밀푀유 한입인게 드러났으니 더더욱 여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하방은 든든하게 받치고 위로는 열린 땅, 대지지분 몇 평짜리 강남아파트는 모래성 아니라 방파제니까 그렇게 닳도록 쳐다본거 아닐까. 거기로 이사하면 늘 긁히고 모자란 내 찌질함도 조금은 희석할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기 살면 저녁마다 캐시워크 100원씩 쌓지 않을걸.
2,900원 한콜 미련도, 호가 29억 아파트 미련도 다 뱉어버리고 돌아가야 했다. 갭벌리기 장인지 키맞추기 장인지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양극화 장이라면 반포 압구정이 진짜 극단아니야? 그럼 여기는 애매한거아닌가 라는 생각과 너따위가 강남을 디스하냐는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내가 천착해온 일이라곤 지대추구가 다인데 결과적으로 지금 애매한 나라서 진짜로 만든 렌트라곤 없었다. 돌아가자. 삼성병원을 지나 양재대로 옆 보도블록을 달리다 육교가 나왔다. 자전거를 짊어지고 계단을 올랐다. 이제 물도 다떨어져서 마른침을 삼켰다. 한탕해보자던 주식은 답도없고, 그럼 뭘해야할까.
“강남아파트라는건 영원할까? 근데 적어도 나 죽기까진 영원할거같아, 쌰갈"
퇴근길은 세번째 다리였다. 탄천교는 훨씬 컸다. 왼쪽 헬리오시티와 저너머 잠실. 오른쪽으론 가락시장사이가 넘사벽처럼 갈라져 보였다. 앞뒤로는 송파구와 강남구. 울고넘는 탄천교, 사실 울진않았지만 허벅지와 엉덩이 땀샘이 대신 통곡중이었다. 다리를 건너는 건 가진게 없어 늘 화가났던 20대의 분노와 더 가지고 싶어 늘 목이 타던 30대의 갈증을 페달로 밟아 넘는 일이었다.